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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해석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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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언자의 현장

by 운영자 posted Sep 0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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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예언자
1. 예언자의 현장

성사학자들에 의하면 구약이 문서의 형태로 완성된 시기는 대체로 B.C. 8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전에는 거의가 구전되어왔고 부분적으로 문서화된 것도 있기는 했으나 그것이 하나의 뚜렷한 역사관에 의해서 오늘의 것이 된 것은 예언자 아모스, 호세아, 미가, 이사야 시대 이후의 일이다. 그 어느 것도 저들의 직접, 간접의 영향을 받지 않고 완성된 것은 없다. 만일에 이와 같은 일련의 예언자들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각 민족의 민족전설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저들이야말로 초야(草野)에 묻혀 그대로 시들어 버릴 수 있는 잡다한 전승들을 '하느님의 약속과 성취'라는 굵은 줄에 꿰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를 전환할 수 있는 하나의 거대한 원동력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렇다면 예언자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었나? 예언자야말로 이스라엘 역사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존재들이다. 저들이 아니었더라면 이스라엘의 신앙이 세계로 진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이스라엘의 신앙과 같은 배경이 없이는 예언자라는 존재가 생겨날 수 없었다. 다른 민족의 역사에도 이스라엘의 예언자와 비슷한 인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만일 예언자가 미래의 전망에서 현재의 집권자를 비판하는 자라면, 죽음을 무릅쓰고 부패한 왕에게 간(諫)하였던 충신(忠臣)들이나 장차 올 운명을 알리고 그것에 대비할 것을 전하고 사라지는 동양의 선인(仙人) 같은 것도 일종의 예언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들은 그 민족의 역사를 이끄는 주류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만일 이스라엘 밖의 어떤 곳에 출현했다면, 신비에 싸인 선인이나 기인(奇人)의 전설쯤을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주역(主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민족의 신앙이 배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발길에 채어서 다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분명히 그러한 면이 있다. 저들은 이스라엘 역사에 홀연히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사람들로서, 자기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만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결코 초인적이고 비현실적인 신비에 싸인 존재들이 아니었다. 저들이야말로 그들 앞에 놓인 상황에 대해서 민감했다. 아니, 저들이야말로 민족의 역사의 대열에 앞장서거나 또는 단신으로 그 흐름을 가로막아 서면서 민족의 현실 한복판에서 그들과 함께 웃고 운 존재들이다. 또 하나의 특수성은 저들은 긴박한 현실 앞에서 결단을 요구한 사람들이다. 저들은 결코 동양의 현인(賢人)이나 또는 그리스의 철인(哲人)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행동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들으며 하느님의 뜻에서 민족에 대한 책임과 민족의 부르짖음을 듣는 실천가들이었다. 저들의 무대가 바로 그 민족사였기 때문에 저들 개개인보다 먼저 저들이 활동하던 시대의 상황부터 알아야 한다.

예언자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이스라엘이 방랑의 삶에서 정착의 삶으로 전환되고, 행군적(行軍的)인 자세에서 조직의 자세로 옮겨진 이후이다. 말하자면 팔레스틴(가나안)에 정착해서 현대적인 의미의 민족이 형성되고 국가체제가 확립된 이후이다.

이스라엘이 민족국가로서 그 면모를 갖춘 것은 다윗왕조의 창건에서 비롯된다(B.C. 1000년). 다윗은 그의 종족 유다지파에게서 왕으로 인정받았으나, 한 종족이 아니라 전 이스라엘의 통일을 위해서 오늘의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거기에 궁전을 세움으로써 유사 이래 처음이며 마지막인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가진 국가적 기초를 이룩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법궤를 예루살렘에 가져옴으로써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을 형성하고, 명실공히 예루살렘을 정치와 종교를 하나로 묶은 이스라엘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 뒤를 이은 솔로몬왕은 다윗왕의 위엄과 그 후광 밑에서 정치나 군사에는 관심이 없고 말초적인 화려한 삶만을 향유함으로써 통일 이스라엘왕국을 외세의 침입을 막아내기 어려운 약한 나라로 전락시켰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죽음과 함께 다윗에 의해서 통일되었던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되고 말았다(B.C. 926년). 그러나 그런대로 8세기 중엽까지는 평화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차츰 이 작은 두 왕국은 당시의 강대세력인 에집트와 아시리아의 틈바구니에서 불안하게 되었다. 마침내 아시리아는 큰 세력으로 오늘의 중동 일대를 석권했다. 그때의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 2세는 뚜렷한 지조 없이 외세에 의존하려는 정책만 쓰다가 마침내 B.C. 722년에 아시리아에 멸망되고 말았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반면에 많은 이방인들이 그 땅에 이주해와 피가 섞이고 종교적으로 유린되어 국권만이 아니라 사실상 모든 점에서 말로에 들어서고 말았다.

아시리아는 남왕국 유다에도 손을 뻗쳐와 그 운명도 풍전등화였으나 돌연히 아시리아군은 철수했다. 그것은 아시리아 국내문제 때문일 터였다. 유다 편에서 보면 하나의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신흥세력인 바빌론의 침략으로 B.C. 587년에 남은 한쪽의 왕국마저 최후를 고하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약탈당하고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시민들을 제외한 모든 귀족, 상류계급, 기술자를 위시하여 많은 사람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그러나 유다 지역은 다행히도 정책적인 이방인의 이주는 없었다. 그러므로 저들의 전승과 전통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으며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민도 어느 정도 자유가 주어져서 그들의 전승을 그대로 유지하며 그 전승을 다듬고 재해석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나라 없는 민족이 되었다. 그 점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가장 비극적인 민족이다. 그러나 저들의 얼은 죽지 않았다. 그때부터 반 세기 후에 바빌론은 몰락하고 그 뒤의 패권은 페르샤가 잡았다. 페르샤의 왕은 포로가 된 이스라엘민에게 귀국의 자유를 주었다. 그래서 저들은 다시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 국가 아닌 이스라엘 공동사회를 재건하고 저들의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것으로 이스라엘 역사는 사실상 끝난 것이 아닌가? 저들의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저들의 운명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의 문제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에게 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러한 흥망성쇠의 민족의 역사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하고 물을 수밖에 없다. 사실상 이 역사 자체에서만은 어떤 특수한 의미도 찾을 수 없고, 따라서 우리가 꼭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 민족의 역사에 관심을 갖는 것은 역사(Historie) 그 자체가 아니다. 그보다도 그런 역사를 통해서 일어난 사건의 의미를 밝혀준 예언자들의 역사관이 우리의 관심이다. 저들은 역사를 단순히 민족의 흥망의 연속으로 보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를 알려주었다.

가령 위의 기록을 남긴 열왕기를 읽으면 우선 연대적인 서술은 아주 간단히, 꼭 필요한 것에만 제약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사실에 대한 기록 외에 아주 다른 형태의 기록이 눈에 뜨일 것이다. 열왕기에 몇몇 왕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간단히 그의 내력을 기록하고 지나가는데, 반드시 그 왕을 판단하는 기록이 뒤따른다. "그가 하느님 앞에 완전했다", 또는 "그가 야훼가 보시기에 악을 행하니라"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그가 왕으로서 정치를 잘했다거나 군사적으로 지고 이겼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측면의 판단이다. 정치를 잘한 왕에 대해 하느님 앞에 완전했다고 하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에도 하느님 앞에 완전했다고 한다. 이 판단의 기준은 전혀 다른 차원에 있다. 즉 하느님 앞에 선 존재로서의 판단기준이다. 이것은 힘이 곧 승리이며, 승리가 곧 선(善)이라는 따위의 역사평가와는 전적으로 다른 눈에 의한 판결이다. 이러한 판단은 누가하는가? 그것은 예언자의 역사관에 그 거점이 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역사의 한복판에서 저들의 민족과 함께 희비애락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 속에 함께 살면서도 그 거점을 역사자체 안에 두지 않았다. 따라서 저들의 판단은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일반 역사서의 구절들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저들의 판단의 거점은 역사 안에서 역사를 초월한 데 있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짊어진 자라는 예언자의 의식이며 입장이다.

참고문헌

서인석, 「예언자들의 고통」, 『신학사상』 제30호(1980.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