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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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종교보다 정의를一아모스

by 운영자 posted Sep 0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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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종교보다 정의를―아모스

이스라엘은 왕국건설 후 1세기내에 급속한 사회적 변천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유목생활에서 농경생활로, 이제는 거기서 상인들까지 생겨나게 되어 경제적인 계층과 아울러 계급이 형성됨으로써 사회문제를 유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여로보암 2세의 북 왕국 이스라엘은 실속 없는 번영의 정점에 달해 있었다.

이때 한낱 목자(牧者)에 불과한 아모스가 이 현실의 한복판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경제적 번영을 노래하는 사회의 현실 속에서 유린되고 있는 정의를 보고 분연히 저들과 대결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사회악을 구체적으로 고발한다.

이스라엘이 지은 죄
그 쌓이고 쌓인 죄 때문에
나는 이스라엘을 벌하고야 말리라.
죄없는 사람을 빚돈에 종으로 팔아넘기고
미투리 한 켤레 값에
가난한 사람을 팔아 넘긴 죄 때문이다.
너희는 힘없는 자의 머리를 땅에다 짓이기고
가뜩이나 기를 못 펴는 사람을
길에서 밀쳐낸다(아모 2, 6~7a).

아모스는 이른바 저술예언자(著述預言者)의 대표적 인물이다. 아모스서 내용은 "이 말을 들으라"와 "저주를 받으라"는 말로 구분되어 있다. 그의 활동기간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B.C. 786/ 82~753/ 46년)시대 후반기인 B.C. 750~760년대이다(열왕하 14, 23~27). 아모스는 남유다 출신이지만 그의 활동무대는 대부분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였다.

그가 시종일관 규탄한 것은 종교를 빙자하여 정의를 유린하는 현실이다. 그는 정의가 집권자와 자본가들에게서 유린되는 현실에 분노하여 고발한다. 정의 유린이란 곧 인권 유린이다. 그는 이런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분노를 듣는다.

사자가 으르링거리는데
겁내지 않을 자 있겠느냐?
주 야훼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 전하지 않을 자 있겠느냐(아모 3, 8).

그의 분노는 개인의 감정이 아니다. 하느님에 의해서 충동된 분노다. 그러나 사회정의를 외치는 것은 이스라엘 신앙의 문제와 유리되어 있지 않다. 아모스의 사상에서 중요한 것은 종교와 정의의 관계다. 그는 그때 이스라엘이 종교와 윤리의 삶을 갈라놓고, 종교를 일상생활과 구별된 다른 영역에 속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한 종교는 인간과 그 세계를 부패시키는가장 추한 종교이다. 그러므로 그는 결국 화살을 바로 저들의 종교생활에 겨눈다. 그래서 정의를 외면한 종교행위에 대해서 이렇게 규탄한다.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燔祭物)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아모 5, 21~22).

이것은 하느님의 뜻을 대변한 것이다. 그때의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공의(公義)와 정의(正義)의 수립이었다. 정의를 외면한 종교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리라"(5, 24)고 외친다.

이것은 아모스에게서 시작된 새 뜻은 아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일과 이웃을 사랑한다는 일은 본래 유리되어 있지 않다. 그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과의 관계에서 정의를 무시해도 좋다는 핑계가 될 바에는 그런 종교의식은 오히려 없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했다.

이웃사랑이란 추상적일 수 없다. 그것은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결단이다. 아모스는 번영하는 경제질서에서 가난한 이웃이 유린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종교를 일상생활과 성별(聖別)함으로써 정의에 둔감한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웃사랑과 유리된 종교행위가 있을 수 없듯이 이른바 세속적인 삶을 떠난 종교적 삶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아니, 종교와 삶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또한 그는 사회문제를 고발했다. 그러나 그는 이른바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뜻의 선포자로서 하느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다. 책임이란 언제나 구체적인 상황, 즉 지금과 결부되어 있다. 현재의 과제를 외면하고 내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경우 내일은 그에게 심판이 된다. 그런 뜻에서 아모스는 폭탄선언을 한다.

저주받아라!
너희 야훼께서 오실 날을 기다리는 자들아.
야훼께서 오시는 날,
무슨 수라도 날 듯싶으냐?
그날은 빛이 꺼져 깜깜하리라(아모 5, 18).

이것은 현재의 구체적인 제 임무를 다하지 않고 여호와의 날, 즉 미래의 궁극적인 구원을 기다리는 어리석음을 규탄하는 말이다.

아모스는 하느님이 저들의 불의를 처벌할 것을 선언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부패에서 올 필연적인 결과와 그때의 국제정세(아시리아의 침입)를 앞당겨 보고 있었다. 그는 이 닥쳐올 운명 앞에서 시정할 것을 촉구한 것이 아니다. 이 민족에게 내려질 하느님의 심판을 예고한다. 왜냐하면 이미 이스라엘이 하느님과의 약속의 관계를 그 스스로 파기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을 선택한 하느님의 뜻은 포기된다는 말인가? 아모스는 그 시대인에게는 너무도 역설적인, 의외의 하느님의 뜻을 알린다.

세상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내가 너희만을 골라내었건만 너희는 온갖 못할 짓을 다하니 어찌 벌하지 않으랴?(아모 3, 2)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했는데도 벌한다는 것은 당시 청중의 기대를 정면으로 부수는 선언이다. 선택했으니 모든 죄를 용서하고 관용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것은 아모스의 독특한 주장은 아니다. 하느님이 직접 선택했다는 것이 곧 용서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선택받았다는 것은 바로 책임지는 존재임을 뜻한다. 따라서 이 책임을 회피하면, 선택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결과를 추궁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느님 앞에 세움받은 책임을 종교적 의무에 국한시킨 데 잘못이 있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종교가 그 구체적 책임에서도 피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책임지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 내가 서 있는 역사의 현실에서 내가 할 일을 하는 일이다. 이것이 예언자들의 기본 자세인데, 아모스는 그 역사적 현장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그 안에서의 불의를 규탄한 데 특색이 있다.

참고문헌

김재준, 「아모스의 생애와 그 예언」, 『 김재준 저작권집』I(한국신학대학 출판부, 1971).

김정준, 『정의의 예언자』(한국신학연구소, 1977).

서인석, 「하느님의 정의와 분노」, 『예언자 아모스』(분도출판사, 1975).

쇼트로프, W., 「예언자 아모스」, 『작은 자들의 하느님 : 구약편』(기민사, 1986).

팬들러, M., 「아모스의 사회비판」, 『신학사상』 제21호(1978. 여름).

서인석, 『하느님의 정의와 분노』(분도출판사, 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