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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2) 낡은 질서와의 대결

옛사람은 "살인하지 마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재판을 받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형제를 향하여 성내는 사람은 누구든지 재판을 받게 되고 형제들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면 의회에 끌려가게 되고 또 형제더러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불붙는 게헨나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마태오복음 5장에는 이러한 형식으로 옛 권위와 맞선 새로운 선언처럼 나타낸 것이 여섯 가지로 구별되어 계속된다.

여기서 옛사람이란 누구인가? 우선 그 안에는 모세의 오경(五經)을 포함한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이 모세의 율법을 하느님과의 계약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인에게 한 그 말씀에 절대로 복종해야 한다. 이 율법을 떠난 다른 삶은 있을 수 없으며, 그 권위를 무시하면 이스라엘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이 옛사람의 말 속에는 이 율법을 구체적인 삶에 적용한 라삐들의 해석과 규제도 포함된다. 그들의 해석은 오늘날의 법률에 있어서 판례법과 같은 구실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모세 율법의 권위를 등에 업음으로써 모세 율법과 똑같은 권위를 지녔다. 이스라엘인에게는 이 권위 외에 삶을 규제하는 어떤 다른 권위도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현재까지의 종교윤리 전체를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렇게 율법과 율법의 해석전통까지 동원해서 그것을 생활의 규율로 만든 주역은 바리사이파다. 그것을 라삐 유다교라고도 한다. 저들은 613항이나 되는 방대한 규율을 제정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주체성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나는 말한다"고 한다. 이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이런 관심은 뒤에 미루고 우선 옛사람들의 교훈에 대한 '나'의 말씀을 들어보자.

그의 말씀은 반드시 새 말이 아니다. 옛사람이 살인하지 말라고 한데 대해서 이웃을 미워해도 살인과 같다고 한다. 옛 사람이 간음하지 말라고 한 데 대해서 남의 아내를 향해서 정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한다. 옛사람은 맹세한 것을 충실히 지키라고 한 것에 대해서 맹세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맹세한 것만 아니라 생활 전체에 성실할 것을 촉구한다. 이런 것들은 옛사람의 말씀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철저화한 것이다. 그는 사람을 죽이면 '비로소'가 아니라, 사람을 미워하면 '이미' 살인한 것이라고 한다. '비로소'가 아니라 '이미'! 이것은 행위와 생각을 한데 묶어놓은 말이다. 그리하여 자기 도피나 어떤 핑계할 길을 막았다.

그러나 그는 정면으로 옛사람의 주장을 거부하기도 한다. 옛사람(모세)은 이혼하면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나'는 이혼을 반대한다. 그는 이것으로 모세의 율법을 폐기한다(마르 10, 2~9). 그러나 그는 동시에 그 시대의 인간들을 전체로서 비판한다. 모세의 법은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한 것을 감안해서 이혼을 허락했다고 하면서 그 율법을 상대화(相對化)함과 더불어 그 시대인(時代人)을 비판한다. 또한 아내를 내버려둔 채 다른 여인들을 계속 아내로 맞아들이면서도 그 아내의 물주(物主) 노릇을 계속하는 인간(남자)들의 횡포를 차단한다. 옛사람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는 윤리의 대(大)원칙을 내세웠다. 그러나 예수는 윤리나 법 그리고 종교에서까지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이 보편적인 원칙을 폐기한다. 아니, 보복은 있을 수 없다. "누가 내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 뺨을 돌려대고", "누가 너를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 주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5리를 가자고 하거든 10리를 같이 가주라"고 한다. 이것은 이미 있는 질서와 거기서 영위하는 생존권에 대한 위협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당시의 청중에게 하나의 충격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엄연히 구약에 씌어진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른다는 사실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옛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했으나 원수를 사랑하고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한다. 여기에 이르면 생존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에게서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것이 자연인에게 가능한가? 체념이 아니라 정말 마음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나를 저주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을까? 그에게 사랑을 보이라면 또 모르겠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를 위해 하느님에게 기도하라고 한다. 이것은 원수와 마주서는 현실에서 도피할 수 없게 하고 원수된 자를 마주서게 하는 말씀이다.

그는 그의 제자들과 밀밭 사이로 지나갔다.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이삭을 잘라먹었다. 유다 사람들이 그것을 위법이라고 항의하였다. 그들에게는 안식일에는 추수하면 안 된다는 안식일법이 있었다.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사형에 해당되는 중죄다. 그만큼 저들은 안식일법의 노예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나'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 27 병행)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폭탄선언이다. 그는 지금까지의 안식일에 대한 저들의 종교적 관념의 전통을 이 한마디로 뒤집어엎는다. 그와 더불어 안식일법의 노예가 된 인간을 해방한다. 이것은 가장 구체적인 인권선언이다.

또 한 번은 어떤 환자가 병 고쳐주기를 바랐다. 그날도 안식일이었다.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가 그의 소원을 들어주나, 안 들어주나에 대한 관심보다도 안식일법에 저촉되는가, 안 되는가에 더 관심을 가졌다. 안식일법은 병 고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죽어가는 그 병자 외에 이러한 생각을 가진 저들에게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좋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좋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좋으냐, 죽이는 것이 좋으냐?"(마르 3, 4 병행)라고 묻는다. 이것은 교훈이 아니라 질문이다. 그런데 질문은 언제나 대답을 결정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누구에게나 자명하다. 그러나 그 질문은 또한 반율법적이다. 이 질문은 안식일법과의 관계는 쏙 빼 버린 것이다. 유다 사람에게는 안식일법을 어기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한 질문인데, 이 질문은 그런 질문을 아예 봉쇄해버린 것이다. 이 질문은 안식일의 특수성을 묵살하여버렸다. 그는 이 질문으로 안식일의 종교적 관심을 윤리적 질문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런데 이 윤리적 질문은 안식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월요일에도 화요일에도 해당된다. 이렇게 해서 안식일의 특수성이 상대화된 것이다.

또 한 번 유다 전통과의 충돌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 일행이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아서였다. 그 항의는 위생관념이 없다는 비난이 아니다. 그것은 율법과 유다 전통을 파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손을 씻는 것은 유다교의 정결법의 하나이다. 정결법은 종교의 중추를 이루고 있었다. 종교의 모든 의식(儀式)은 정결법과 직결되어 있었다. 그러기에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서 매사를 정결하게 준비해야 했다. 몸을 씻는 것은 물론이요, 음식에도 제한이 있고, 어떤 것을 보고 만지는 것, 나아가서는 성생활(性生活)까지도 규제되었다. 그런데 예수는 또 한 번 폭탄선언을 한다. "무엇이든지 밖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 15 병행). 이것은 종교 전반의 중추를 뒤흔드는 선언이다. 까닭은 예배(cult)에 있어서 이 정결법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이 말은 정결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단지 정결은 외적인 의식(儀式)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적인 정화가 외적인 정화에 앞서야 한다는 뜻이다.

이상의 발언들은 당시의 이스라엘에게 충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지도자들은 이런 반율법적인 말씀 때문에 예수와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전통을 파괴하는 이단자로 보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파괴를 위한 파괴를 하려는 의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무조건 율법이나 전통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는 일은 없다. 아니, 오히려 그는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당시의 유다교의 전통적 규례를 충실히 지킨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새로운 종교를 말하려거나 새로운 윤리를 수립하려는 의도도 없으며, 새로운 하느님의 뜻의 전달자로 자부하지도 않는다. 그는 이스라엘의 조상이 믿는 똑같은 하느님, 즉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기에 그는 하느님을 새롭게 정의한다거나 자기의 말을 새롭게 받은 계시라고도 하지 않는다. 그의 비판의 중심은 종교가 삶에서, 예배가 이웃사랑에게서, 행위가 생각에서 유리되어 따로따로 평행선을 긋고 있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저들은 전체로서 하느님 앞에 책임지는 존재가 되지 않고 부분적으로 하느님과 관계하는 것을 문제로 삼았다.

구약의 십계명은 이스라엘 율법의 총집약이다. 저들은 그것을 삶의 기간(基幹)으로하고 있다. 이 십계명의 상반부는 하느님과의 관계, 하반부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규제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의 이스라엘은 상반부와 하반부를 나누어 놓고 그 둘에 평행선을 그었고, 주로 상반부, 말하자면 종교문제에 치중함으로써 이웃과의 문제를 소홀히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이 주로 저들의 '종교생활' 보다는 이웃과의 관계를 더 강조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참 삶의 길을 묻는 사람에게 새 길을 가르치지 않고 십계명의 하반부를 강조하였다(마르 10, 17 이하 병행).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에 관련된 것이다. 참 삶을 위해서는 새것이 필요없다는 태도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런 것들(십계명)은 이미 어릴 때부터 충실히 지킨 것으로 자부하고 그것 외의 어떤 다른 길을 예수에게 구했다. 이것은 그가 이 십계명을 충실히 지켰다고 자부하면서도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이 없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무엇이나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그 사람은 좌절하였다. 그에게 문제는 그런 것을 어릴 때부터 다 지켜왔다는 그 자명성(自明性)이었다. 그는 이웃사랑을 생활 전체로 한 것이 아니라 부분으로 한 것이다. 참사랑을 알면 사랑을 다했다고 하기는 불가능하다. 어떻게 지켰단 말인가?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것은 또 하나의 다른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다 지켰다는 그 자체가 정말 사실인가를 밝히는 행위를 요구한 것이다. 그는 역시 참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는 이웃사랑과 참 삶을 유리시켜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참 이웃사랑도 사실상 불가능했음을 말한다.

예수는 또 한 번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 그 질문은 모든 계명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으뜸이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두 가지 계명을 말하였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그것이다(마르 12, 28~31 병행). 이 대답도 새것이 아니라 구약 가운데 두 곳에 있는 계명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 대답은 그 질문 자체를 수정하고 있다. 사실 어떤 것이 가장 첫째 되는 것이냐고 묻는 것은 계명들을 각기 분리함으로써 그것에 특별히 주력하자는 자세이다. 그때의 이스라엘의 상식으로서는 첫째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물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하나를 묻는데 둘을 내세웠다. 이것은 그때 유다 종교가 이웃사랑을 소홀히하는 것을 밝히는 결과가 되기도 하였지만, 이 두 계명을 유리시켜서 평행적으로 지키는 저들의 율법이해를 비판한 것이기도 하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사랑과 유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아니,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은 이웃을 사랑하는 그 안에 있지 다른 영역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초점을 이웃사랑에 둔다. 이웃이야말로 내가 마주선 구체적인 현실이다. 따라서 이웃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내 삶을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이며, 그것은 동시에 하느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뜻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 저 유명한 최후심판의 비유이다(마태 25, 31 이하).

최후심판은 이미 결정되었다. 심판받는 인간들은 좌우로 갈린다. 심판자는 선고한다. 우선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판결내용은 판결을 받는 저들에겐 전혀 기억에 없는 것이었다. 저들은 그런 일을 한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심판자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는 말로 판결의 비밀을 알려준다.

이 비유는 그때 종교인들에게 어떻게 들렸을까? 최후의 심판의 기준이 이런 것이라면 저들의 종교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된 제사 의식적인 계율들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비유는 이런 모든 종교적인 것을 사물화(死物化)하지 않는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축복받은 자들이 이웃을 돕는 행위를 할 때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한 것이라면 또 모르겠다. 그런데 저들은 저들이 한 일을 특별히 율법에 복종한다는 의식에서 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율법에 대한 복종이라는 의식은 실종되어 있고, 이웃사랑 만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그러면 해야 할 일은 이웃을 돕는 것뿐이라는 말인가? 이 마당에 성전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절기를 지키는 것 따위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비유는 그것을 읽는 그리스도 인들에게 마찬가지 문제를 일으켰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중요한 교리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 것이 아닌가? 이것은 분명히 종교관념 세계에서 볼 때 충격적이 아닐 수 없으며 큰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비유의 초점은 심판의 기준을 가르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사랑이 결정적인 복종행위라는 것과 이웃사랑이 어떠해야 함을 측면에서 나타내는 데 있다. 저들은 이웃을 돕는 것을 삶 자체처럼 자명하게 받아들여왔다. 그들은 이웃을 돕는 일 자체에 충실했으며 그것을 어떤 다른 것과 연결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그 행위가 종교생활의 일부라고 보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한 행위의 대가 따위는 전혀 전제하지 않았다. 만일 그러한 전제에서 이웃을 도왔다면 저들은 이웃을 '너'로 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버렸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저들의 순수한 사랑의 행위 자체에 영원한 의미가 있거나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것으로 끝난다. 중요한 것은 이 같은 행위를 하느님께 한 행위로 인정한 데 있다. 이것은 그 행위에서부터 나오는 필연이 아니다. 그 인정 자체가 이러한 행위에 영원한 의미를 준 것이었다.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유명한 비유가 있다. 그것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이다(루가 10, 25~37).

한 사람이 노상에서 강도의 습격을 받아 쓰러졌다. 때마침 이스라엘 종교의 상징과도 같은 제사장, 그리고 레위인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저를 구해주지 않고 지나가버렸다. 그 다음, 스스로 이스라엘의 주류라는 유다인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말에서 내려 그의 상처를 싸매주고 여관에 안내하고 그 비용까지 지불할 뿐 아니라, 만일 비용이 더 필요할 때 다시 와서 책임지기로 하고 제 길을 갔다. 이 비유는 이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지적할 것은 종교적 대표인 제사장과 레위인을 사마리아인과 대조한 것과, 또 이 사마리아인의 행동이 아무런 종교적인 색채를 나타냄이 없이 단순히 그 수난자의 필요에 응하는 꾸밈없는 행동만 말한 점이다. 이것은 '이웃이 누구냐'에 대한 비유이다. 이웃은 바로 수난자의 필요에 응한 사람이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나 그를 제사장 족속과 대조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 비유가 비록 이웃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하여도 이것을 돕는 자에게는 종교적으로 멸시받는 이 사마리아인의 사랑의 행위 앞에 제사장 족속이 무색해졌음에 틀림없다. 이것은 종교적 의무와 이웃사랑을 분리시키는 당시 유다교 전반에 대한 비판이 깊이 깔려 있다.

이웃과의 관계를 무시한 종교행위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다가(하느님께 하는 행위) 형제와의 관계에서 해결 안 된 것이 있으면 먼저 그것부터 해결하고 난 다음에 제물을 드리라고 하며(마태 5, 24), 기도하다가도 이웃에 대해서 원한을 품은 것이 있으면 그것부터 해결하라(마르 11, 25)고 하는데, 이 경우에는 그리고 와서 기도하라는 말이 없다. 이처럼 이웃사랑을 제사장, 기도, 제물을 드리는 행위 등과 계속적으로 관련시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배도 기도도 하느님을 향한 직통로는 못 된다. 예배도 기도도 내가 마주선 이웃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이상에서 보면 예수는 철저한 휴머니스트로 보인다. 그는 이른바 종교문제보다 윤리문제에 관심을 집중한 것 같다. 이웃과의 문제에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키려고 한 것이나 인간을 문제로했다는 점에서 볼 때 그렇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것들이 있다. 예수는 인간 또는 인간 사이의 질서 자체를 자기 충족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사랑을 말할 때 결코 인간의 존엄성이나 그 안에 있는 어떤 능력을 강조하지 않으며, 이웃과의 관계를 말할 때 윤리 프로그램을 이룩하기 위한 사회질서 확립을 위해서 내세우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느님 앞의 존재이다. 그의 관심은 그 당시의 사회 질서에서 소외된 무리에 쏠리고 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 멸시받는 자, 수난자, 죄인 등의 친구가 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사회분석, 즉 계급적인 측면에서 본 정의론을 편 것이 아니다. 예수가 보복행위를 금하고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할 때는 세계 평화의 원리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문제 앞에서의 책임적 존재이기 전에 하느님 앞에 선 책임적 존재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왜?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기(마태 5, 45) 때문에. 자비하라! 왜? 하느님이 자비하시기(루가 6, 36) 때문에. 죄인들을 버리지 마라! 왜? 하느님이 죄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런 대전제를 가졌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은 직접적으로 사회윤리의 프로그램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직접적인 뜻을 내세우는 그의 말씀에서 나타난 인간과 사회비판의 소리에 귀를 막아버려서는 안 된다. 하느님이 모두에게 해와 비를 고르게 준다는 것을 강조함은, 그 사회가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고 있음을 폭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나타낸 것이 저 유명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비유이다(루가 15, 1~31).

한 목자가 100마리의 양 중에서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 그 목자는 99마리의 양을 두고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낸다. 그는 그 양을 찾고 기뻐서 잔치를 베푼다. 이처럼 죄인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것은 사회문제라는 측면에서 보면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물량으로 가치를 따져볼 때 99 대 1에서 99를 두고 하나를 찾아 떠난다는 결론은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잃어버렸다'는 말이다. 그것은 정적(靜的)인 사회분석에서 온 행동규범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난 현장에서의 결단 행위를 말한다. 지금 '상실'이라는 사건, '소외'라는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이 사건의 희생자에게 전체를 쏟으라는 말이다.

한 아버지가 두 아들을 가졌다. 둘째아들이 자기 몫을 미리 받고 아버지를 떠나서 방탕한 생활로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온다. 아버지는 그의 잘못을 묻지 않고 그를 맞아들이며 아들의 명분을 되돌려줄 뿐 아니라 큰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밭에서 일하고 돌아온 맏아들이 아버지에게 항의한다. "저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며 한 번도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없었는데 제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함께 지내느라고 아버지의 재산을 다 먹어버린 그 아들이 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군요." 이것은 사실 의무와 권리의 균등, 분배 따위를 그 근간으로 하는 이른바 사회질서 수립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에는 정당한 항의로서 그것을 무시하면 사회를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아버지가 기뻐하는 일, 즉 하느님이 원하신 것, 그것이 모든 것의 기준이다.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의 책임적인 존재다. 그런데 그 하느님은 무시간적인 규범이나 법칙 같은 것이 아니다. 그 하느님의 뜻은 역사적으로 나타난다. 그 하느님은 어제의 하느님이면서 또한 어제에 머물러 있는 하느님이 아니다. 구약의 하느님은 이스라엘과 계약한 하느님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은 그 테두리 안에서 자기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계약을 어길 때는 용서없이 정벌하는 하느님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설교하며, 이 용서의 하느님의 뜻이 인간의 윤리행위의 모티프가 된다.

한 왕의 종이 그 왕의 재산을 탕진하였다. 왕은 그에게 그의 몸과 처자와 그 밖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그 빚을 갚으라는 준열한 요구를 한다. 그러나 왕은 그 종의 간청을 들어 돌연히 그를 무조건 용서하여 준다. 그런데 그후 왕은 그 종을 다시 잡아다가 그 빚을 갚기까지 감옥에 넣으라고 명령하였다(마태 18, 23- 34). 왜? 이 용서받은 종은 그 다음 자기에게 빚진 부하를 만나서 자기가 왕에게 하던 것과 같은 부하의 간청에도 응하지 않고 그를 투옥하였기 때문이다. "이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그 많은 빚을 모두 면하여주었으니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부하를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 아니냐?" 이것이 왕이 저를 투옥한 이유다. 그 이유는 처음 체포의 그것과는 아주 다르다. 처음에는 빚을 졌기 때문에, 즉 의무와 권리의 질서에서 체포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은 새로운 사건이 벌어전 이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왕이 무조건 그를 용서한 일이다. 이 용서의 사건 앞에 이 종은 새로운 의미의 책임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왕 앞에 선 자로서 이웃에 대한 책임이다. 여기서 그 '이웃'은 바로 빚진 이웃으로 '그들을 용서하라'는 명령에는 '하느님이 용서한다'는 사실이 전제로 되어 있다.

과거를 묻지 않고 무조건 용서하는 하느님, 이러한 신앙이 그의 철저한 사랑의 명령의 뒷받침이 되고 있다. 이것은 그의 하느님의 나라의 성격과 직접 관련이 있다. 지금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새 세계가 임박했다. 그 새 세계는 낡은 것의 무조건적인 종말을 뜻한다. 그는 이러한 종말적인 하느님의 나라의 현실을 앞당겨서 그 빛 아래에서 그와 같이 철저한 사랑의 명령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무조건적인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은 이웃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개방된 상황, 즉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음을 뜻한다.

참고문헌

정양모, 「예수와 율법」, 『神學展望』 제14호(1971. 겨울).

안병무, 「율법과 예수, 율법과 하나님의 뜻」, 『現存』 제1~4호(1969.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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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해석
(한길사)
List of Articles
표지
증보판에 부치는 말
머리말
       
제1부 고전(古典)으로서의 성서
       
제1장 고전의 의미
    1. 인류와 고전
    2. 현대인과 고전
제2장 성서의 특성
제3장 성서를 보는 눈
제4장 성서에서 보여주는 역사의 주체
제5장 성서의 자료와 편집
       
제2부 약속을 믿고 산 민족사 : 구약
       
제1장 한 책의 민족 이스라엘
제2장 인간사 서장
    1. 창조된 세계와 인간(아담)
    2. 잘못 출발된 역사
제3장 도상의 나그네
    1. 족장들
    2. 탈출의 족장 : 아브라함
    3. 하느님과 겨룬 사나이一야곱
제4장 엑소더스
    1. 히브리
    2. 모세
    3. 하느님과의 계약
    4. 십계명
제5장 종족공동체의 형성
    1. 가나안 정착
    2. 이스라엘 종족동맹
    3. 판관들
        1) 판관 삼손(판관 13~16장)
        2) 판관 기드온(판관 6~8장)
제6장 왕국시대
    1. 왕권과 국가
    2. 다윗왕조
    3. 왕국시대
        1) 솔로몬 왕
        2) 분단 200년
제7장 예언자
    1. 예언자의 현장
    2. 찬양과 저주一나단
    3. 왕권과의 대결자一엘리야
    4. 종교보다 정의를一아모스
    5. 남은 무리 一이사야
    6. 심판과 새 가능성 一예레미야
    7. 해골의 부활一에제키엘
    8. 너 위한 수난一이름없는 예언자
    9. 예언자의 말의 성격
    10. 과거, 현재, 미래
   
제3부 새로운 개벽 : 신약
   
제1장 예수의 사건
    1. 예수의 시대상
    2. 역사와 해석자
    3. 예수의 선포
        1 ) 하느님 나라의 초대
        2) 낡은 질서와의 대결
    4. 예수의 행태
        1) 무슨 권위로
        2) 예수와 민중
    5. 십자가 처형
    6. 갈릴래아에서 만나자一부활사건
제2장 예수운동의 전진(사도행전)
    1.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민중운동
    2. 이스라엘 민중운동의 목표와 사상
    3. 민중사실
제3장 바울로의 삶과 증언
    1. 그의 삶
        1) 바울로의 위치
        2) 민중사건에 항복한 사울
        3) 바울로의 연대기
    2. 바울로의 증언
        1) 인간세계 심판
        2) 사람됨의 조건
        3) 죽음에서의 탈출
    3. 그리스도와 역사
    4. 자유인의 길
        1) 앞을 향해 달리는 삶(필립 13,1~14)
        2) 하느님 앞에 선 존재 (갈라 4, 1~10)
        3) 이웃과 더불어의 존재
    5. 바울로의 민중론
        1) 고린토교회의 사회계층
        2) 민중을 보는 바울로의 눈
        3) 택함을 받은 민중
    6. 바울로의 수난기
        1)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2) 예루살렘에서
        3) 문제점들
        4) 바울로는 ‘정치범’이 아닌가
        5) 예수의 수난사와 바울로의 수난기
제4장 요한의 증언
    1. 요한복음의 특이성
        1) 공관서와의 관계
        2) 요한의 정신적 풍토
        3) 예수의 새 해석
    2. 개벽의 선언
    3. 갈림길
제5장 박해와 희망(계시록의 신앙)
    1. 묵시문학의 성격
    2. 로마제국과의 대결
    3. 결단할 때
    4. 영원의 노크
    5. 마라나타
한국어로 된 성서 연구 참고문헌
전집간행에 부치는 말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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