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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5. 십자가 처형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는 결국 로마제국에 체포되어, 식민지 정치범에게 가하는 가장 잔혹한 형벌인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사형을 당했다. 그런데 그것을 서술한 복음서들의 기록은 상당히 모호하고 많은 의문을 갖게 한다.

흔히 사람들은 마르코복음 14장부터 수난사라 하여, 이미 마르코 편자가 이 복음을 쓸 무렵에는 대체로 지금의 모양으로 구성되었으리라고 보고 있다(그것이 구전이든 문서화이든).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마르코의 편집자적 입장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수난사가 성립되는 과정을 추적한 학자들은 많다. 불트만 등은 이 수난사의 원초적 모습을 찾아내려고 애를 쓴다 『공관복음전승사』, 329면 이하). 물론 마르코도 그 전승자료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한편 마르코복음의 원형은 13장에서 끝나고 14장 이후는 다른 이들의 손에 의해 첨가되었다고 보는 가설(E. Trocmè)도 있다. 그러나 마르코 편자는 예수의 생을 추적하는 데 있어서 처음부터 그의 죽음을 전제하고 있으며(3, 6), 세 번에 걸친(8, 319, 3110, 33~34) 수난죽음 예고가 있다. 그리고 포도원 농부의 비유(12, 1~9)에서 농부의 외아들을 죽이는 얘기는 분명 예수의 수난사를 반영한 것이다.

다른 복음서들도 비록 그외의 자료를 많이 도입했으나 마르코복음의 수난사를 대본으로 한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서는 마르코를 기준으로 해서 수난에 초점을 맞추어 물음을 제기해본다. 그것은 핵심적인 질문과 대답이 될 것이다. 도대체 예수가 왜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마르코 편자는 예수의 예루살렘행을 서술한 전기적(轉機的) 구절에서 그의 결의가 뚜렷했음을 나타낸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는데 예수께서 앞장서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놀랐고 뒤를 따라오던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10, 32).

'놀랍고 두려워한다'는 표현은 신적 계시와 같은 나타남 앞에서의 심정을 묘사하는 데 자주 쓰이고 있다(9, 616, 7). 이것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예수의 장엄한 결의를 표명하려 함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단순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한 순례의 길이 결코 아니었던 것을 나타낸다. 예수는 세 번의 수난의 예고 중 두 번을 장로, 대제사장 또는 율법사들과 관련지어했는데, 그들이 바로 예루살렘의 어용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민중의 환영은 오히려 그의 신변의 위험을 말한다. 마르코는 침묵하나 루가는 이에 바리사이파가 항의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루가 19, 39) 이것은 전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들어서자 성전을 숙청했다. 그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마르 11, 17)고 힐책했다. 이것은 중요한 선언이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대로, 탈예루살렘파들이 분노한 일차적 대상은 바로 저들이었다. 저들은 외세에 의존해서 성전을 점유했을 뿐 아니라 하느님까지 '연금'하여 독점하고, 그것을 미끼로 이방에서 온 유다인들의 외국 돈을 부정하다고 환전하여 착취하고, 성전의 제물로 바치는 짐승은 순결해야 한다는 구실로 실은 자신들의 소유를 전매하여 막대한 이득을 챙기고, 성전을 위해 전체 유다인에게서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강요했다. 그뿐 아니라, 성전의 장(長)이라는 직책이 곧 그 민족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어용의 통치권도 있기 때문에 그 자리를 탐내어 매관매직이 횡행했으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것도 버릴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힐책은 바로 에쎄네파나 젤롯당의 분노를 그대로 대변한 것과 같다. 그리고 마르코는 예수가 체포되는 직접적 이유가 바로 이 사건인 양보도한다(11, 18). 그것은 이미 위에서 서술한 대로 마르코 12장의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도 반영된다. 성전을 숙청한 예수는 낮에는 공공연히 성안에서 가르치고 선포하며, 밤에는 성밖(베다니아)으로 나간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예루살렘 기간중 더욱 주목할 것은 '다윗의 성도시(聖都市)' 예루살렘 성 안에서 메시아는 다윗의 후예라는 다윗왕조 이래의 전통적 도그마를 파기한 일이다(12, 35~37). 이것은 간접적으로는 다윗왕조 전통에 대한 도전이요, 직접적으로는 예루살렘의 어용지배층이 디디고 있는 주춧돌을 부수어버리는 일이며, 그런 의미에서 정면 도전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선언한다(13, 2). 이 선언을 예언으로 보느냐 또는 이미 되어진 현장을 서술하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할 수 있다. 만일 후자가 옳다면, 이것은 예수의 말씀이 아니고 예루살렘이 함락된 쓰라린 경험을 예수의 예언으로 쓴 말이다. 나는 이 입장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그런 선고를 하지 않았으리라고 단정할 이유는 없다. 아무튼 마르코 편자는 예수가 성전파괴마저 예고하는 것으로써 예수의 대(對)예루살렘 도전의 극치를 나타낸 셈이다.

그러면 예수는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해 입성했는가? 그렇다면 젤롯당과 다를 바 없다. 또 홀로 했을 리 없고 일당(제자)을 끌고 들어와서 폭력으로 숙청하다가 체포되었다는 추측을 해봄직하다. 사실 라이마루스(H.S. Reimarus)에서 시작해서 브랜던(S.G. Brandon)에 이르러서 예수는 폭력으로 예루살렘을 공격했다는 해석의 시도가 있어왔다. 그러나 마르코에는 적어도 그러한 추측을 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사람들은 가끔 예수의 제자들이 칼을 품고 있었다는 기록(마태오, 루가), 그리고 특히 루가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검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22, 36)고 한 말 등으로 그 근거를 삼으려고 하는데, 그러나 마르코에는 바늘 하나 지녔다는 진술이 없다. 그러면 무엇이 목적인가?

성전을 숙청하는 그의 모습은 계획성 없이 분노의 몽둥이를 들고 덤비는 무모한 민중의 일면을 보는 것 같다. 게쎄마니의 마지막 밤, 배신당하고 체포당하여 산헤드린 앞에 끌려가, 군인들이 침 뱉고 주먹질하는 가운데서, "자, 그대를 치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맞혀보라"고 희롱당하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 당당한 로마의 총독과 몽매한 군중 앞에 선 초췌한 모습, 임금도 아니면서 가시왕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은 채, "유다인의 왕 만세"라고 조롱과 모욕을 당하면서도 꼼짝못하고 최후까지 침묵하던 그 모습, 어처구니없는 재판과정을 거쳐 십자가에 처형되기까지 그 어디에 하느님이 계셨던가? 그가 그렇게 믿었던 하느님은 철저히 무(無)가 되고, 오직 때리면 맞고 찌르면 피나고 조르면 죽는 그런 현실이야말로 바로 무능한 민중이 겪는 현장이 아니었던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비극적인 절규 다음, 모든 한(恨)을 품었다 토하듯 크게 한 번 소리치고 운명할 때까지 어떤 초자연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런 상태야말로 바로 무능한 민중의 현장을 집약한 것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이른바 '메시아전(傳)'이라는 종교서(宗敎書)를 쓰는 이 편자가 이렇게까지 신 부재(神不在)의 현실로만 예수의 수난을 엮었을까? 사람들은 이런 모습 그대로는 참을 수 없어서 예수는 비명을 지른 것이 아니라 시편을 노래했다느니, 마르코에서는 그중 일부만을 소개하고, "다 이루었다"(요한) 또는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옵니다"(루가)라는 식으로 한 영웅의 죽음으로 만들려고 하나, 마르코는 그런 덧없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아니, 마르코에 의하면 예수는 철저히 패배자로 죽은 것이다. 어느 이름없는 민중들이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죽어갔듯이…….

마르코에는 계속 그가 얻어맞고 침을 맞고 채찍질당하고 조롱당한 것을 기록하며, 십자가상에서 신음하는 순간까지도 조롱당한 것을 서술한다. 아마도 그는 이러한 것을 의식적으로 강조하여 이사야서 53장의 고난의 종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소식을
누가 곧이 들으랴?
……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주는 자가 어디 있었느냐?
그렇다.
그는 인간사회에서 끊기었다(이사 53, 1~8).

이것이 바로 예수가 당한 수난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것은 역사상 무명의 민중이 당하는 바로 그런 꼴이다. 그러기에 이 '고난의 종'은 집단개념이다. 즉 수난당하는 이스라엘의 민중(民)이다.

그렇다면 마르코는 예수의 죽음에서 이 민중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으로 끝났는가?

아니다. 마르코는 여기서 비극을 노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처참하게 당하는 수난의 뜻을 찾은 것이다. 그것은 그 수난이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최후만찬석 얘기에서 간단명료하게 드러났다(14, 22-25). 그는 민중의 매를 맞은 것이다. 아니, 민중으로서 죽은 것이다.

그래서 꼼짝할 수 없었던 것일까? 그는 그의 이 무력함에서 바로 '고난의 종'에서 말하는 고난의 의미를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졌다.
……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이사 53, 4~5).

만일 이런 추측이 사실이라면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유가 설명된다. 그는 예루살렘에 죽으러 올라간 것이다. 왜 하필 예루살렘을 죽음의 장소로 택했을까? 그것은 극히 간단하다. 민중의 죽음을 죽기 위해서! 참 민중의 죽음이란 권력자의 손에 죽는 것이다. 왜 민중의 죽음을? 그것은 무저항의 전형(典型)인가? 아니다. 그것은 가장 용기 있는 이의 저항이다. 그것은 민중의 한을 짊어진 죽음이면서 동시에 강자가 약자를 그렇게 죽이는 행위를, 또는 약자가 어떤 방법으로 역(逆)의 입장에 섬으로써 다시 같은 방법으로 복수하는 그러한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서남동의 입장) 예루살렘을 그의 죽음의 장(場)으로 선택해야만 했다. 그럴 때에만 참 부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헹겔, M., 김명수 역, 『십자가 처형』, 현대신서 122(대한기독교서회, 1982).

안병무, 「수난사에서 본 마가의 신학」, 『신학사상』 제3호(1973. 겨울).

______, 「예루살렘 성전체제와 예수의 대결」, 『신학사상』 제58호(1987. 가을).

강요섭, 「예수의 성전숙청 이야기에 대한 문학적 사회학적 고찰」, 『신학사상』 제41호(1983. 여름).

황성규, 「십자가 처형과 부활」, 월요신학서당 편, 『신약성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증언한다』(한국신학연구소, 1987).

웨버, H. L., 강한표 역, 『십자가―고증과 성서해석』(대한기독교출판부, 1979).

쇼트로프, L., 「예수의 무덤 옆에 있던 막달라 마리아와 그 여인들」, 『신학사상』 제38호(1982.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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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해석
(한길사)
List of Articles
표지
증보판에 부치는 말
머리말
       
제1부 고전(古典)으로서의 성서
       
제1장 고전의 의미
    1. 인류와 고전
    2. 현대인과 고전
제2장 성서의 특성
제3장 성서를 보는 눈
제4장 성서에서 보여주는 역사의 주체
제5장 성서의 자료와 편집
       
제2부 약속을 믿고 산 민족사 : 구약
       
제1장 한 책의 민족 이스라엘
제2장 인간사 서장
    1. 창조된 세계와 인간(아담)
    2. 잘못 출발된 역사
제3장 도상의 나그네
    1. 족장들
    2. 탈출의 족장 : 아브라함
    3. 하느님과 겨룬 사나이一야곱
제4장 엑소더스
    1. 히브리
    2. 모세
    3. 하느님과의 계약
    4. 십계명
제5장 종족공동체의 형성
    1. 가나안 정착
    2. 이스라엘 종족동맹
    3. 판관들
        1) 판관 삼손(판관 13~16장)
        2) 판관 기드온(판관 6~8장)
제6장 왕국시대
    1. 왕권과 국가
    2. 다윗왕조
    3. 왕국시대
        1) 솔로몬 왕
        2) 분단 200년
제7장 예언자
    1. 예언자의 현장
    2. 찬양과 저주一나단
    3. 왕권과의 대결자一엘리야
    4. 종교보다 정의를一아모스
    5. 남은 무리 一이사야
    6. 심판과 새 가능성 一예레미야
    7. 해골의 부활一에제키엘
    8. 너 위한 수난一이름없는 예언자
    9. 예언자의 말의 성격
    10. 과거, 현재, 미래
   
제3부 새로운 개벽 : 신약
   
제1장 예수의 사건
    1. 예수의 시대상
    2. 역사와 해석자
    3. 예수의 선포
        1 ) 하느님 나라의 초대
        2) 낡은 질서와의 대결
    4. 예수의 행태
        1) 무슨 권위로
        2) 예수와 민중
    5. 십자가 처형
    6. 갈릴래아에서 만나자一부활사건
제2장 예수운동의 전진(사도행전)
    1.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민중운동
    2. 이스라엘 민중운동의 목표와 사상
    3. 민중사실
제3장 바울로의 삶과 증언
    1. 그의 삶
        1) 바울로의 위치
        2) 민중사건에 항복한 사울
        3) 바울로의 연대기
    2. 바울로의 증언
        1) 인간세계 심판
        2) 사람됨의 조건
        3) 죽음에서의 탈출
    3. 그리스도와 역사
    4. 자유인의 길
        1) 앞을 향해 달리는 삶(필립 13,1~14)
        2) 하느님 앞에 선 존재 (갈라 4, 1~10)
        3) 이웃과 더불어의 존재
    5. 바울로의 민중론
        1) 고린토교회의 사회계층
        2) 민중을 보는 바울로의 눈
        3) 택함을 받은 민중
    6. 바울로의 수난기
        1)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2) 예루살렘에서
        3) 문제점들
        4) 바울로는 ‘정치범’이 아닌가
        5) 예수의 수난사와 바울로의 수난기
제4장 요한의 증언
    1. 요한복음의 특이성
        1) 공관서와의 관계
        2) 요한의 정신적 풍토
        3) 예수의 새 해석
    2. 개벽의 선언
    3. 갈림길
제5장 박해와 희망(계시록의 신앙)
    1. 묵시문학의 성격
    2. 로마제국과의 대결
    3. 결단할 때
    4. 영원의 노크
    5. 마라나타
한국어로 된 성서 연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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