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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2. 바울로의 증언
1) 인간세계 심판

로마제국 : 세계제국의 수도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로마서)는 바울로의 사상을 총집약한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그런데 이 장엄한 그리스도 증언서의 서두에서 바울로는 가차없이 인간세계의 심판을 선언한다. 그의 인간들에 대한 심판은 다음과 같이 집약된다.

의인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느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비뚤어져 쓸모없게 변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들의 혀는 사람을 속이며
그들의 입술에는 뱀의 독이 있고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하다.
그들의 발은 피 흘리는 일에 재빠르며
간 데마다 파멸과 비참을 남긴다.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눈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로마 3, 10~18).

이상은 구약의 시편을 위시하여 여러 곳의 말들을 엮어 인용한 것인데, 아마도 사람을 이처럼 철저하게 심판한 글은 그 유례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로가 본 인간세계이며 그것에 대한 분노는 심판을 선포하던 예언자들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이 분노에서 사람들은 동시에 모닥불같이 타오르는 인간애를 느낄 것이다. 그토록 뜨거운 사랑이 없는 속에서 그 같은 분노가 치밀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추상적인 인간의 죄성을 규탄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을 안중에 두고 하는 욕설이다. 먼저 그는 로마제국을 휩쓰는 쾌락주의, 특히 상류사회에 퍼져가는 변태적 성욕추구 행위에 대해서 분노를 터뜨린다. 당시 그레꼬 로마의 상류사회는 동성(同性) 사이의 성욕행위가 성했는데, 이것은 쾌락주의가 포화상태에서 생겨난 변태적 방종이다.

이 같은 상류층의 쾌락주의는 세계제국으로 남의 것을 빼앗아 이루어 놓은 풍요 위에서 번식된 것이다. 저들은 젊은이들을 무장시켜서 세계로 내보내 그들이 피 흘린 대가로 부강해졌다. 이 부강을 독점한 상류층은 자족자만 상태에 빠져서 그 이상 무엇도 안중에 없었으니 하느님 따위를 찾을 까닭이 없었다. 그러므로 선(善) 따위도 의미가 없고, 있는 것은 쾌락을 더욱 향유할 수 있는 부(富)의 지속뿐이였다. 그래서 그들의 발은 피 흘리는 일에 재빠르고, 피를 본 그들은 점점 포악해지는 반면, 가는 곳마다 평화를 깨고 파멸과 비참만을 남겼다. 그리고 목구멍은 열린 무덤처럼 무엇이나 삼켜 썩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세계의 제국을 이끄는 로마의 상부의 상태다.

또 한편으로 바울로는 율법을 독점한 하느님의 선민(選民)으로 자부하고 남에게 그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가르치면서도 자신들은 그것을 전혀 무시해버리는, 아는 것과 사는 것이 전혀 다른 유다인들을 안중에 두고 있다. 저들은 남에게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면서 도둑질하고,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서 스스로 간음에 빠져들고, 우상을 미워 하면서 신전에 있는 우상의 물건이 탐나 훔쳐내며, 율법 율법 하면서 자신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로마 2, 21~23). 이렇게 보면 인간 전체가 모두 절망상태인 것이다. 바울로는 그러므로 이 세상에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바로 인류는 모두 저주받을 수밖에 없다는 선고이며, 그것이 바로 세계 심판의 선고인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짧은 단문에서 그렇게 자주 '심판'이라는 단어가 반복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람들은 로마제국에 대한 바울로의 자세를 비판한다. 이유는 바울로가 유다인으로서 로마제국에 대하여 직접적 비판이나 도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권력으로서의 로마제국에 대한 그의 입장이 불투명하다는 것은 이유야 어디 있든지 간에 시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누구나 받아야 할 바울로가 말하는 심판에서 로마가 제외된 것은 아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의 오만성과 헬레니즘 영역에서의 '로마의 평화'(Pax Romana)에 대한 저들의 신념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알면 로마제국을 포함한 인간세계 전체에 대한 바울로의 저주가 지닌 전면적 대결성을 절대로 간과할 수 없게 된다.

당시의 황제들은 자신을 신격화하여 황제숭배를 강요했다. 그 당시의 로마 화폐에는 카이사르 티베리오(Caesares Tiberius, A.D. 14~37년) 초상이 그려져 있었고, 앞면에는 '숭배받기에 합당한 신적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34~A.D. 14년)의 아들 카이사르 티베리오'라고 씌어 있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어머니 리비아(Livia)가 신적 옥좌에 앉았고 그 오른쪽에는 올림픽의 패와 왼쪽에는 올리브 가지를 그려 넣음으로써 신적인 평화의 구현을 성격화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서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한 말은 물론 '카이사르만을 제외하고'라는 뜻이 아니다. 즉 이 세계를 저주하면 로마제국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이 된다. 무엇보다도 바울로는 저들이 의식적으로 계속 하느님을 거부하며 하느님을 승인할 수밖에 없는 조건 아래 있으면서도 그것을 묵살하고 있음을 공격하는데, 그것이 바로 로마제국의 체질인 것이다. 이와 더불어 선민으로 자부하는 유다인도 예외없이 그 안에서조차 단 한 사람의 의인도 없다는 선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가 세계를 이렇게 심판하는 근거는 두 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인간세계의 구조적 관점에서요, 다른 하나는 인간내면의 종속상태에 대한 관점이다. 바울로는 자주 세상(kosmos)이라는 희랍어를 사용하는데, 대부분 그것은 '인간세상'이라는 뜻으로 쓴다(로마 3, 1911, 12; 고후 5, 19). 그런데 이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이다(고후 4, 4). 악마가 바로 '이 세대의 신'인 것이다.

그는 세계를 단순히 자연법칙적 우주로 보지 않고 어떤 악한 의지의 포로가 되어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본다(로마 8장 후론). 이 세상을 지배하는 신은 사람을 죄로 이끈다. 그러므로 '죄'란 단순히 윤리적인 하나하나의 잘못이 아니라 악마에게 예속되는 종속상태 그 자체다. 그러므로 '죄'란 말은 때때로 '죄의 권세'라고 한다(로마 6, 7). 이것은 죄가 하나의 권력구조에서 파생된다는 말이다. 또한 이것은 예수가 이 세상을 악마(사탄)가 지배한다고 보며, 악마를 한 집단(Reich, 구조)으로 본 것과 상통한다.

이런 뜻에서 바울로는 인류가 모두 죄의 영역 속에 들어갔다고도 하는데, 그것은 '아담=사람'이 범죄함과 동시에 인류역사 속에 죄가 침입해 들어옴으로써 그렇게 됐다고 한다(로마 5, 12~14). 말하자면 인간은 죄를 지음과 동시에 '죄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때부터 인간은 '세상을 이루어가는 요소들'(우리 새번역에서 '원시종교'라고 했다)의 노예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 죄의 힘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실재와 같다. 그러나 이 세상, 그리고 그 권세는 결국 허무한 것, 지나가버릴 것, 말하자면 무상(無常)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정하면 있는 것이지만, 무시하는 자에게는 없는 것이며 있어도 무력한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색즉공(色卽空)과도 상통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변(思辨)에 따라서 또는 지각(知覺)에 따라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 아니라 투쟁함으로써만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생각'이라면 '투쟁하는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그 투쟁은 홀로 고행(苦行) 따위를 함으로써 번뇌의 요인이 되는 사념(思念) 같은 것을 극복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내걸고 싸워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것으로 보이는 권세 자체는 허상이지만 그것을 무서워하고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 바로 그 몽매한 믿음을 이용하여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이 구체적인 힘으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바울로는 "그(이 세상) 통치자들은 없어져가는 권력의 소유자입니다"(고전 2, 6)라고 한다. 이 짧은 표현 속에는 여러 가지 뜻이 복합되어 있다. 바울로는 이 세상의 통치자를 "이 세상을 다스리는 자들"이라고도 한다. 그들은 권세를 갖고 사람에게 군림한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어떤 '절대'로 보이는 권세를 등에 업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다스림을 받은 자가 그렇게 인정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런데 바울로는 그 권세는 없어질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그 '세상의 권력'이 정치권력으로 둔갑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눈을 감고 생각을 돌리면 없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권력은 그것과 더불어 그러한 허상을 등에 업은 구조화된 물리적 힘과 대결해야만 비로소 없이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율법 : 죄의 세력과 관련시켜 바울로가 또 다른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 율법이다. "내가 전에는 율법 없이 살았는데 계명이 들어오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로마 7, 9). "다시 말하면 죄가 계명을 통하여 기회를 얻어 나를 속이고 또 계명으로 나를 죽인 것입니다"(로마 7, 11). 이 말은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 구절대로 받으면, 첫째 율법은 본래 없는 것, 둘째 죄도 없고 따라서 죽음도 없었던 것, 셋째 계명이 주어짐으로써 죄를 유발하므로 결국 계명은 죄를 살리고 인간을 죽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바울로가 말하자는 것은 무엇인가?

바울로는 지금 예를 든 전후 문맥에서 율법 자체는 악이 아니고 선한 것, 나아가서는 거룩한 것(로마 12, 13)이라고까지 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것이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이 본래 모세를 통해 인간에게 주어진 말씀이나 그것이 체제화되고 그 기존체제를 위한 이데올로기가 될 때 사람을 노예로 만들고 만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바울로의 편지 중에서도 이른바 율법주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을 고집함으로써 그가 새로 받은 복음의 뜻을 말살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면 법이냐, 믿음이냐'라는 문제를 다룬 투쟁적 논문이다. 그중에는 그의 율법관이 잘 반영되어 있다. 갈라디아서에도 그는 율법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님을 말하면서, 그 역할은 인간을 감시하고 감금하는 것이라고 한다(갈라 3, 23).

감시하고 감금하는 것은 인간을 미성년, 우범자 또는 죄인이라고 규정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마치 강력한 법 질서를 제정하기 위해 인간의 성악설(性惡說)이 필요하듯이, 율법의 존재근거는 인간의 악을 전제해야 가능하다. 이 말은 율법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죄'가 계속 실재하거나, 없으면 적어도 있다고 주장할 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그런 뜻에서 "율법을 행함으로 살려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갈라 3, 10)라는 말을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살겠다는 사람의 경우와 비길 만하다. 어느 누가 정신병원에 억류되어 살겠다고 한다면 자신은 정신병자로 살겠다는 말이기 때문에 저주 아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율법이 하나의 체제로 인간을 구조적으로 감금하고 노예화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그것은 바로 인간의 본래성인데―에서 인간을 차단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로는 이 율법, 엄밀히 말하면 체제화된 법 질서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사람의 '약점'을 이용해서 형성된 비본래적인 것이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한 하느님의 약속을 본래적인 것으로 본다(갈라 3, 16). 그 약속은 인간에게 어떤 법적 조문에 비추어 어떤 공로를 세웠기 때문에 그 댓가로 준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느님의 일방적인 사랑의 선물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의 법 이전의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법(토라)이 주어졌다. 이것은 바울로의 계산대로 하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보다 430년 후에 주어진 것이다(갈라 3, 17). 그 법이 주어진 것은 법이 필요없는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죄'다. 그러면 법은 죄를 다스리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참 삶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로는 법은 "…… 죄를 드러내려는 것"(갈라 3, 19) 으로써 "덧붙여진 것"(prosetethi)이라고 한다. 이것은 그 법이 소극적 의미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법은 "몽학선생(paidagogos)"(갈라 3, 34), "후견인"(갈라 4, 2)이라고도 하며, 율법은 죄를 규제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나 결과적으로는 죄를 의식하게 하므로 범죄의 자극을 주는 결과까지 가져왔다고 한다(로마 7, 7~13).

법은 본래는 없는 것,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병이 난 사람이 병실에 갇혀야 하듯이 원상이 회복될 때까지는 소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 그는 그 원상으로 되는 약속이 이미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것의 역할은 그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 덧붙여진 것인데, 결국은 이제 없어질 잠정적인 의미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또 다른 각도에서 법의 진상을 설명한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내가 있었다. 본처 '사라'와 '덧붙여' 얻은 '하갈'이라는 첩이 있었다. 그런데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날 것을 약속했다. 그 아들에게는 인류의 미래가 약속되어 있었다. 그에 반해서 하갈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은 '약속'과 상관없이 난 '서자'(庶子)이다. 말하자면 상속권도 없고 인류의 미래와도 상관없다.

바울로는 이 하갈을 모세의 법이 주어진 시나이 산과 비교한다. 하갈은 종이 될 자를 낳듯이 시나이 산은 사람을 노예로 하는 법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로써 법은 자유와 대립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며, 하나는 본래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본래적인 것임을 분명히한다(갈라 4, 21~26).

그런데 이 같은 알레고리적 해석에 덧붙여 예루살렘이 바로 그 '아라비아의 시나이 산'이라고 한 것은 주목할 발언이다. 그것이 너무도 의례적인 표현이어서인지 사본마다 달라서 해석에 어려움을 주나, 분명한 것은 그 당시의 예루살렘을 사람을 노예로 하는 법의 상징인 시나이 산과 같은 것으로 해석한 점이다. 그는 분명하게 "예루살렘이 그의 자녀와 함께 종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갈라 4, 25)이라고 한다.

예루살렘은 그 당시 유다교의 중심이요 상징이다. 그러나 그곳은 과거나 현재적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희망의 상징이기도 했다. 당시의 유다교 안에는 장차 메시아 왕국은 바로 이 예루살렘을 왕도(王都)로 하여 이루어지리라는 다윗 사가(史家)들의 역사해석 전통이 깊이 뿌리박고 있었던 것이다(이사 54, 1060 이하; 토비 13, 9 이하20~21 등). 그러한 예루살렘을 계집종 하갈 또는 사람을 노예로 하는 지금은 이방(異邦) 지역에 있는 시나이 산에 견주는 것은 율법을 주축으로 하는 유다교의 받침돌을 빼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무튼 바울로는 이미 율법의 때는 분명히 지나갔는데 사람들이 여전히 그 법에 매달려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고 있는 행위 자체가 없는 것, 지나간 것을 실재하는 힘이 되게 하는 것임을 거듭 강조하며, 그것은 성인이 됐으면서 다시 어린이가 되어 후견인을 자초(自招)하는 것과 같은 행위이며(갈라 4, 1~7), 하느님의 아들의 권리는 포기하고 '무력하고 유치한 원시종교로 또다시 돌아가 그것들에게 종노릇하려는 것'(갈라 4, 9)과 같은 행위로 간주하여 그런 행위를 규탄한다.

이상에서 바울로는 이 세계의 지배권의 진상을 폭로함과 함께 그 허상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인간의 내적 자세와 직접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바울로는 인간의 내적 문제를 구약의 전통, 그리스의 인간학 개념들을 동원해서 설명한다.

참고문헌

문상희, 「바울 신학에 있어서의 我의 개념」, 『神學論壇』 제7호(1962).

바르트, K., 「律法과 初字에 대한 바울의 理解」, 『 神學思想』 제6~7호(1974, 가을~겨울).

전경연, 「바울의 法 개념」, a ―3. 죽음에서의 탈출, 『人間과 未來』 제3호(1975. 12).

박수암,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죄 사상―로마서 6장을 중심으로」, 『장신논단』 제6호(1990).


|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List of Articles
표지
증보판에 부치는 말
머리말
       
제1부 고전(古典)으로서의 성서
       
제1장 고전의 의미
    1. 인류와 고전
    2. 현대인과 고전
제2장 성서의 특성
제3장 성서를 보는 눈
제4장 성서에서 보여주는 역사의 주체
제5장 성서의 자료와 편집
       
제2부 약속을 믿고 산 민족사 : 구약
       
제1장 한 책의 민족 이스라엘
제2장 인간사 서장
    1. 창조된 세계와 인간(아담)
    2. 잘못 출발된 역사
제3장 도상의 나그네
    1. 족장들
    2. 탈출의 족장 : 아브라함
    3. 하느님과 겨룬 사나이一야곱
제4장 엑소더스
    1. 히브리
    2. 모세
    3. 하느님과의 계약
    4. 십계명
제5장 종족공동체의 형성
    1. 가나안 정착
    2. 이스라엘 종족동맹
    3. 판관들
        1) 판관 삼손(판관 13~16장)
        2) 판관 기드온(판관 6~8장)
제6장 왕국시대
    1. 왕권과 국가
    2. 다윗왕조
    3. 왕국시대
        1) 솔로몬 왕
        2) 분단 200년
제7장 예언자
    1. 예언자의 현장
    2. 찬양과 저주一나단
    3. 왕권과의 대결자一엘리야
    4. 종교보다 정의를一아모스
    5. 남은 무리 一이사야
    6. 심판과 새 가능성 一예레미야
    7. 해골의 부활一에제키엘
    8. 너 위한 수난一이름없는 예언자
    9. 예언자의 말의 성격
    10. 과거, 현재, 미래
   
제3부 새로운 개벽 : 신약
   
제1장 예수의 사건
    1. 예수의 시대상
    2. 역사와 해석자
    3. 예수의 선포
        1 ) 하느님 나라의 초대
        2) 낡은 질서와의 대결
    4. 예수의 행태
        1) 무슨 권위로
        2) 예수와 민중
    5. 십자가 처형
    6. 갈릴래아에서 만나자一부활사건
제2장 예수운동의 전진(사도행전)
    1.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민중운동
    2. 이스라엘 민중운동의 목표와 사상
    3. 민중사실
제3장 바울로의 삶과 증언
    1. 그의 삶
        1) 바울로의 위치
        2) 민중사건에 항복한 사울
        3) 바울로의 연대기
    2. 바울로의 증언
        1) 인간세계 심판
        2) 사람됨의 조건
        3) 죽음에서의 탈출
    3. 그리스도와 역사
    4. 자유인의 길
        1) 앞을 향해 달리는 삶(필립 13,1~14)
        2) 하느님 앞에 선 존재 (갈라 4, 1~10)
        3) 이웃과 더불어의 존재
    5. 바울로의 민중론
        1) 고린토교회의 사회계층
        2) 민중을 보는 바울로의 눈
        3) 택함을 받은 민중
    6. 바울로의 수난기
        1)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2) 예루살렘에서
        3) 문제점들
        4) 바울로는 ‘정치범’이 아닌가
        5) 예수의 수난사와 바울로의 수난기
제4장 요한의 증언
    1. 요한복음의 특이성
        1) 공관서와의 관계
        2) 요한의 정신적 풍토
        3) 예수의 새 해석
    2. 개벽의 선언
    3. 갈림길
제5장 박해와 희망(계시록의 신앙)
    1. 묵시문학의 성격
    2. 로마제국과의 대결
    3. 결단할 때
    4. 영원의 노크
    5. 마라나타
한국어로 된 성서 연구 참고문헌
전집간행에 부치는 말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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