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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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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2) 사람됨의 조건

구원을 받아야 할 인간, 자연적인 상태에 있는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세력은 실존적으로 볼 때 세 가지이다. 육(肉), 죄, 죽음이 그것이다.

사람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신이 아닌 인간으로 유한된 존재이게 하는 힘이요, 실재(實在)이다. 육체는 제한되어 있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필요로 하며 목이 마르면 물이 필요하다. 만일 그런 것을 공급하지 않으면 그 기능은 마비된다. 그런데 그것 자체는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니다.

그러나 바울로는 이 육체가 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육체는 자기충족적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공급을 필요로 한다. 열흘 굶고 도둑질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육체가 필요로 하는 것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을 때는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태(胚胎)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육체의 여러 가지 욕구는 윤리적인 한계를 넘게 한다. 그래서 살인, 강도, 전쟁 따위가 얼마든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런데서 그치지 않는다. 육체의 욕구는 마침내 인간에게 절대적인 것으로 군림할 수 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이 쉽게 절대화된다. '에사오'가 시장해하는 순간 그 동생 '야곱'이 기회를 노려서 제공한 팥죽 한 그릇에 장자(長子)의 명분을 팔았다는 구약의 이야기는 어느 옛날의 한 우발사(偶發事)가 아니라 언제든지 가능한 일이다. 장자의 명분만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자기를 팔고 생명까지도 내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육체의 욕구에서 사람은 쉽게 육체를 절대화시킴으로써 그것에 의지하고, 그것을 자기 삶의 최후의 보장으로 믿고 그것에 목숨을 걸게 된다.

권력, 명예, 돈에 대한 욕심, 또 그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결국 이 육체에 굴복한 행위이다. 바울로는 이러한 자세를 '죄'라고 한다. 이러한 생활관을 가진 사람은 피조물의 노예가 된다. 그는 손에 잡힌 것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자유가 없다. 새것에 대해서 페쇄적인 상태! 그것이 바로 '죄인'의 상태인 것이다.

죄의 필연적인 결과는 죽음이다. 인간의 죽음이 죄와 직결되었다고 보는 것은 바울로 사상의 특색이다. 그러면 육체는 죄와 죽음이 머무르는 장소이다. 바울로는 이 셋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스스로 행하면 그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가 하는 것입니다"(로마 7, 14 이하). 즉 바울로는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내적인 분열, 갈등이 있음을 말한다. 이것은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래서 그는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사람입니까?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로마 7, 24)하고 부르짖는다. 바울로의 이 비명은 그 개인의 내적 경험만이 아니라 세계 안에 있는 인간 전체의 비명이기도 하다, 인간은 계속적으로 이러한 자기 분열 속에서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반면에 이러한 고통을 겪는 것은 바로 인간임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짐승에게는 이러한 고민이 있을 수 없다. 짐승에게도 고통은 있다. 그런데 그 고통은 육체의 어떤 결함에서 온다. 따라서 그것은 그런 것을 충족시키면 해소된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에 머물러 있을 때 그 고민이 더욱 크다. 왜냐하면 인간은 육체만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인간의 특징을 양심 이 있는 점이라고 한다. 그래서 양심을 높이 내세운다. 유다인은 양심 대신 율법을 내세웠다. 유다인은 율법, 그외의 인간들은 양심을 구원의 힘처럼 내세웠다. 바울로도 유다교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인간은 율법에 따라서 충실히 살면 의롭게 된다고 믿었으며, 그것이 바로 인간구원의 보장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러한 신념은 완전히 뒤집혀졌다.

율법으로는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갈라 3, 11; 로마 3, 20 참조).

이것은 양심으로는 의롭게 될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왜 그런가? 바울로의 이 선언은 양심대로 살려고 애써본 사람에게는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 반면에 양심대로 살 생각을 이미 포기한 사람에게는 무의미하게 들릴 것이다. 우리는 바울로의 이 선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의 실제생활에서 양심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양심(로마 2, 15) : 사람에게는 불안이라는 것이 있다. 불안의 특징은 그 이유가 분명하지 않은 점이다. 어떤 구체적인 잘못도 없는데 공연히 안절부절 못한다. 어떤 위기가 닥친 것도 아닌데 초조하다. 그래서 사람은 향락을 추구하여 도박을 하고 사냥을 한다. 또는 홀로 있는 것을 피하여 부단히 사람을 찾아 무의미한 소동 속에 묻혀버리기를 원한다. 왜? 이것은 속성과도 같이 웅크리고 있는 이 불안에서 도피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불안은 도피할 수도 없거니와 도피해서는 안 된다. 불안! 그것은 인간이기에,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면 인간에게 불안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그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불안하다는 것은 사람의 삶이 짐승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연적인 법칙의 확률에 실려서 돌아가는 것과 같지 않음을 뜻한다. 사람의 삶이 탈선할 우려 없는 기차에 앉은 것과 같은 것이라면 불안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이미 확정된 것의 진행이 아니라 언제나 잃어버릴 수도 있고 얻을 수도 있는 가능성이기 때문에 불안하다.

둘째, 그러나 이 불안은 인간의 삶이 가야 할 목표가 있음을 암시한다. 목적이 없으면 지루할지는 몰라도 불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갈 방향이 어디인지 확실하다면 불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목표는 있으나 그것이 확실하지 않을 때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까닭은 지금 자기의 삶이 제 길을 걷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서 인간이 불안하다는 것은 인간은 홀로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관계 속의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가령 여기 한 아들이 있다고 하자.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는 존재다.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는 아들은 언제나 불안할 수 있다. 그 불안은 반드시 자기가 아버지의 뜻을 어긴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어길 수 있는 자이기 때문에 불안하다. 그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그 불안은 더 클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불안은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인간을 인간 아닌 삶에 주저앉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불안에서 사람을 도피하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법 또는 양심이라는 것이다.

바울로는 한때 율법의 조항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자기의 할 일을 다한 것처럼 생각했다. 그는 율법에 비추어보면 흠잡을 것이 없었다(필립 3, 5~6; 사도 22, 3). 그러나 그는 어떤 계기를 통해서 스스로 자기를 속이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은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고 선언한다(갈라 3, 11). 그것만이 아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저주 아래 있는 것이라고도 한다(갈라 3, 10).

왜 그럴까?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의무와 권리의 조항이 상세하게 규정되었다면 그것은 벌써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까닭은 그들 사이는 인격과 인격, 사랑과 신뢰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그 중간에 제3의 것에 의해서 조종되고 있기 때문이다. "법으로 이렇게 규정되었으니 나는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비참한 일이며, 그 산 관계는 사실상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더욱이 사랑하는 관계에서 "내가 법적으로 무엇을 잘못했소?"라고 반문하면서 자기를 내세운다면, 그 법은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직접적으로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 '법으로 따집시다'라는 데까지 오면 그와의 인격적 관계는 이미 깨어진 것이고, 이때 법은 다만 깨어진 관계를 정리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일밖에는 없다.

양심도 마찬가지다. "나는 양심적으로 부끄러운 것이 없소"라고 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간에 이 말을 한 후에는 벌써 그들 관계는 깨어지고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와 고립된 것을 뜻한다.

이렇게 법이니 양심이니를 내세운 관계는 상전과 종의 관계, 채무자와 채권자와의 관계이지 사랑하는 사이의 관계는 이미 아니다. 더욱이 법이니 양심을 내세워서 자기 공로를 권리의 대가로 내세우게 되면 그는 그런 것들의 노예가 된 것이다. 양심은 자기를 고립시킬 때는 이미 양심이 아니다.

양심이란 사실상 관계개념이다. 그리스어에서 '양심'이라는 단어는 '더불어 안다'라는 말의 복합명사다. 영어의 conscience나 독일어의 Gewissen이 이런 뜻을 나타낸다. 양심은 남과의 관계를 차단할 때는 죽은 것이며, 그것은 다른 이와의 관계를 열어놓을 때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은 또한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기도 하다. 가령 우리가 홀로 서 있을 때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나는 떳떳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훌륭한 인격을 대할 때나 또는 어떤 고귀한 사랑을 경험할 때 나는 초라하고 부끄러워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런 경우, 그 떳떳하던 양심은 그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또는 아무리 나 홀로 내가 행한 어떤 일이 떳떳하더라도 내 사랑하는 사람이 그것을 승인하지 않으면 그 양심은 동요를 일으킨다. 그러나 반면에, 그러한 경우에 나에게 양심은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양심이란 결코 스스로 존재하는 어떤 실재가 아님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자기 이해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나를 가장 잘 아는 듯하나, 나의 참모습은 밖에서 비추어질 때, 즉 타인과의 바른 관계에 설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격적인 관계는 법으로 다 포괄하지는 못한다. 인격관계에서는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안도의 순간이 허락되어 있지 않다. 아니, 오히려 하면 할수록 하지 못하는 자기를 발견하게 되어 점점 빚진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바울로는 인간을 고립된 존재로 보지 않는다. 그는 인간을 언제나 '하느님 앞에 선 존재'(Sein vor Gott), 즉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본다. 그것은 동시에 사람을 '이웃 앞에 선 존재' 즉 이웃과의 관계에서 본다는 말과 통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혼자서 양심의 보장을 받은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아니, 그는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가 마주선 대상이 무엇을 원하는가에서 자기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찾는다. 그 대상은 산 대상이다. 따라서 그가 나에게 향한 요구나 뜻은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람에게는 이만하면 되었다는 순간이 있을 수 없다. 또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그것이 곧 상대방의 뜻과 일치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기에 언제나 불안하다.

그런데 이 불안은 공포와는 다르다. 불안은 어떤 구체적인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다. 즉, 그 불안의 이유는 구체적이 아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그의 잘못이 구체적으로 지적되었을 때 오는 것이다. 즉, 무엇을 어겼는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 때에 두려워지는 것이다. 가령 한 아들이 그 아버지와의 사랑의 관계에 있을 때는 그 사랑 앞에서 불안하다. 그러나 그가 구체적으로 아버지의 명령을 어겼을 때 이 불안은 공포로 변하는 것이다. 그의 공포는 그의 잘못 때문에 그 아버지에게서 벌을 받을지 또는 그와의 관계가 끊어질 지도 모른다는 구체적인 위험에 직면한 데서 오는 것이다. 이러한 공포는 그 아버지의 구체적인 명령, 즉 '……하면 안 된다', '……하라'라는 뜻이 밝혀진 것 때문에, 또한 내 양심이 그것을 밝힐 때 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아버지의 명령은 율법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내 양심은 내 잘못을 시인한다. 그러므로 양심은 결국 나에게 '나는 죄인이다'라는 의식을 안겨준다. 그런 뜻에서 바울로는 "율법이 아니었다면 나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탐심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로마 7, 7)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이 나를 죄짓기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켜주는가? 그렇지 않다. 아니, 양심은 그런 힘이 없다. 그것은 오히려 나에게 좌절감을 주고 그 아버지에게 나아갈 용기를 가로막는 역할밖에 못한다. 까닭은 그 양심은 내 죄의 고발자 역할밖에 못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양심은 내 몸에 박힌 화살이나 파편처럼 내가 어떤 행위를 할 때마다 내가 저지른 일을 자극할 뿐이다. 그리하여 나를 구속(拘束)된 상태에서 구출하지도 못하고 점점 어두운 세계로 몰아넣는 소극적인 역할만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바울로는 또 하나의 중요한 경험을 말한다.

그런데 죄는 이 계명(Sollen)을 통하여 기회를 얻어 내 속에서 온갖 탐욕을 일으켰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입니다. 내가 전에는 율법 없이 살았는데 계명이 들어오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로마 7, 8~10).

이러한 바울로의 말을 우리는 우선 심리학적으로 납득할 수 있다. '하지 말라'는 것을 모를 때는 그것을 하여도 그것이 잘못인 줄 모른다. 그러기에 그 한 일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히지는 않는다. 이런 경우를 어린이에게서 볼 수 있다. '하지 말라'를 알게 되었을 때는 이상하게도 동시에 그것에 대한 호기심을 일으킨다. 말하자면 '하지 말라'는 하고 싶은 충동을 유발한다. '하지 말라'를 몰랐을 때는 그런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 오히려 '그것을 할 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그래서 호기심이 유발되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아이러니이다.

그러면 율법이나 양심 따위는 전혀 무의미한 것인가? 그것은 인간을 죽음으로 이끄는 역할밖에 못하는가? 이러한 양심이나 율법은 없애버리거나 외면해야 할 것인가?

바울로는 '아니!'라고 한다. 그는 이런 소극적인 역할에서 적극적인 면을 본다. 양심이나 율법은 시비를 가려내주기는 하지만 사람이 이미 범한 사실을 시정해주지는 못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을 오히려 좌절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은 또한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양심은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계속적으로 고발함으로써 지금까지의 나의 길에 제동을 거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 함으로써 자기를 죄의 타성에 내맡겨서 거기에 안주하지 못하게 한다.

어떤 사람이 살인을 했다. 그는 그것이 폭로될 것이 두려웠다. 그는 그의 범죄를 영원히 감추기 위해서 그것을 목격한 사람을 처치해 버렸다. 그러나 또 하나의 증인이 있었다. 그것은 자기 안의 양심이었다. 이 양심은 죽여버릴 길이 없었다. 그 소리를 없애려면 결국 자살하는 길밖에 없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살인자라는 것을 감추어둔 채 안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만일 그에게 양심이 없었다면 영원한 죄인으로 살다가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양심이 죄의 상태에 주저앉은 그를 일으켜세우고 새로운 가능성을 바라볼 수 있도록 자극하였다.

이렇게 양심은 인간이 육체에 안주하여버림으로써 죽음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고 '아니다'라고 한다. 그리고 양심은 '너는 육체의 노예여서는 안 된다. 너는 육체만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라고 알려준다. 양심이 나에게 분열을 가져다주거나 고민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내 안에 이미 분열, 모순이 있는 것을 없는 듯이 무시하고 안주하려는 나를 깨워 일으켜서 다른 길을 찾도록 인도하는 간접적인 길 안내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로는 유다인에게는 율법에, 비유다인들에게는 양심에 호소한다. 그는 비유다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죄를 도피할 수 없으며, 핑계할 수 없을 것이다"(로마 1, 20)라고 한다. 만일 사람에게 양심이 없다면 어떤 호소도 불가능할 것이다. 바울로가 율법이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으로 전향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참고문헌

퓰러, R. H., 「바울 연구」, 『現存』 제66호(1975. 11~12).

李相昊, 「바울의 倫理」, 『神學論壇』 제8호(1964. 10).

안병무, 「바울의 현존 이해」, 『現存』 제1호(1969.7).


|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List of Articles
표지
증보판에 부치는 말
머리말
       
제1부 고전(古典)으로서의 성서
       
제1장 고전의 의미
    1. 인류와 고전
    2. 현대인과 고전
제2장 성서의 특성
제3장 성서를 보는 눈
제4장 성서에서 보여주는 역사의 주체
제5장 성서의 자료와 편집
       
제2부 약속을 믿고 산 민족사 : 구약
       
제1장 한 책의 민족 이스라엘
제2장 인간사 서장
    1. 창조된 세계와 인간(아담)
    2. 잘못 출발된 역사
제3장 도상의 나그네
    1. 족장들
    2. 탈출의 족장 : 아브라함
    3. 하느님과 겨룬 사나이一야곱
제4장 엑소더스
    1. 히브리
    2. 모세
    3. 하느님과의 계약
    4. 십계명
제5장 종족공동체의 형성
    1. 가나안 정착
    2. 이스라엘 종족동맹
    3. 판관들
        1) 판관 삼손(판관 13~16장)
        2) 판관 기드온(판관 6~8장)
제6장 왕국시대
    1. 왕권과 국가
    2. 다윗왕조
    3. 왕국시대
        1) 솔로몬 왕
        2) 분단 200년
제7장 예언자
    1. 예언자의 현장
    2. 찬양과 저주一나단
    3. 왕권과의 대결자一엘리야
    4. 종교보다 정의를一아모스
    5. 남은 무리 一이사야
    6. 심판과 새 가능성 一예레미야
    7. 해골의 부활一에제키엘
    8. 너 위한 수난一이름없는 예언자
    9. 예언자의 말의 성격
    10. 과거, 현재, 미래
   
제3부 새로운 개벽 : 신약
   
제1장 예수의 사건
    1. 예수의 시대상
    2. 역사와 해석자
    3. 예수의 선포
        1 ) 하느님 나라의 초대
        2) 낡은 질서와의 대결
    4. 예수의 행태
        1) 무슨 권위로
        2) 예수와 민중
    5. 십자가 처형
    6. 갈릴래아에서 만나자一부활사건
제2장 예수운동의 전진(사도행전)
    1.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민중운동
    2. 이스라엘 민중운동의 목표와 사상
    3. 민중사실
제3장 바울로의 삶과 증언
    1. 그의 삶
        1) 바울로의 위치
        2) 민중사건에 항복한 사울
        3) 바울로의 연대기
    2. 바울로의 증언
        1) 인간세계 심판
        2) 사람됨의 조건
        3) 죽음에서의 탈출
    3. 그리스도와 역사
    4. 자유인의 길
        1) 앞을 향해 달리는 삶(필립 13,1~14)
        2) 하느님 앞에 선 존재 (갈라 4, 1~10)
        3) 이웃과 더불어의 존재
    5. 바울로의 민중론
        1) 고린토교회의 사회계층
        2) 민중을 보는 바울로의 눈
        3) 택함을 받은 민중
    6. 바울로의 수난기
        1)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2) 예루살렘에서
        3) 문제점들
        4) 바울로는 ‘정치범’이 아닌가
        5) 예수의 수난사와 바울로의 수난기
제4장 요한의 증언
    1. 요한복음의 특이성
        1) 공관서와의 관계
        2) 요한의 정신적 풍토
        3) 예수의 새 해석
    2. 개벽의 선언
    3. 갈림길
제5장 박해와 희망(계시록의 신앙)
    1. 묵시문학의 성격
    2. 로마제국과의 대결
    3. 결단할 때
    4. 영원의 노크
    5. 마라나타
한국어로 된 성서 연구 참고문헌
전집간행에 부치는 말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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