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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3) 죽음에서의 탈출

비약 :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인간입니까?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 이것은 이 세계 안에 존재하면서 양심을 가진 사람의 비명을 대신한 소리이다. 양심은 그에게 절망을 가져온 것이다. 그 이상 걷던 길을 걸을 수 없도록 양심이 그 길을 꽉 막아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비명 다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주신 하느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로마 7, 25)라는 환호를 올린다. 이것은 큰 비약이다. 우리는 이 비명과 그 뒤에 연결된 환호 사이에 한 무덤이 있음을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비명에서 낡은 나는 죽어 묻히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급격한 변동에서 자수하는 어떤 살인자, 아버지를 반역하고 떠났다가 돌아온 탕자 등을 연상할 수 있다. 사람을 죽이고 법망을 교묘히 피하면서 살인자임을 끝끝내 감추는 것으로 자기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만이 유일한 살길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양심의 고발에 더 견딜 수 없어서 자기는 살인자라고 하면서 높은 건물 위에서 투신했다. 그러나 그 순간 살인지는 죽고 본래의 자기를 찾은 것이다.

부모를 배반한 아들이 끝끝내 제힘으로 사는 것을 생명으로 알다가 양심의 채찍에 견디지 못해 아버지에게 돌아와서 그의 처분을 기다리는 경우, '나는 나로서 산다'는 그는 죽고 이제 그 아버지에 의해서 주어질 새로운 나로서 살게 된다.

바울로가 율법(양심)에서 그리스도에게 전향한 것이 바로 이러한 죽음과 삶의 사건이다. 이런 뜻에서 그는 율법이 그리스도에게 이끄는 안내자의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

 

십자가 : 예수의 생애에서 바울로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그의 죽음의 사건이었다. 그의 죽음, 그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유다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바울로의 표현대로 하면 하나의 "거리낌"(고전 1, 23)이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처형됐다는 것은 범법자라는 실증이다. 그랬기에 예수가 로마제국의 손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것은 로마의 판도에서 그를 메시아로 선고하는 데에 커다란 거리낌이 됐다. 까닭은 십자가처형은 반로마적인 최악의 범죄자에게 주는 극형이기 때문이다. 유다 관념에서 보면 그것은 하느님께 버림받은 것이 된다. 버림받은 것만이 아니라 '저주'받은 것이다. 유다 사회에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받았다는 관념이 지배했기 때문이다(갈라 3, 13). 그런데 바울로는 이 십자가처형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의 표현이며, 그의 뜻을 달성한 구원의 사건이라고 했다.

예수는 죽기 위해서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이 구원의 뜻을 실현했다. 여기에 온 인류의 운명의 열쇠가 있다. 그러므로 바울로는 그리스도교의 설교를 단 한마디로 십자가의 말씀(고전 1, 18)이라고 했다. 그는 이 십자가의 말씀 외에 다른 것은 전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 십자가는 무슨 의미에서 구원의 사건인가?

바울로는 이 사건이 구원의 사건임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당시에 일반이 알고 있는 통속적인 표상과 그림으로써 그것을 설명했다. 그는 출애굽기에서 나타난, 유월절에 희생된 양(羊)의 이야기로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설명했다. 그는 예수의 죽음이 인간의 죽음을 대신 한 희생이라고 본 것이다(고전 5, 7). 또는 율법이나 제사의식에서 생각하는 대속(代贖)의 사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설명했다(로마 3, 25). 즉, 인간의 죄에 따르는 벌을 예수가 대신 받았다는 뜻이다(고전 6, 20). 그 안에는 고대의 노예제도가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고대에는 노예를 해방하기 위해서 신전에서 일정한 종교의식을 치르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을 나타내는 그림들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고 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에서 체험한 사실이 중요하다. 다음의 몇 가지 사상에 그 본뜻이 나타나 있다.

첫째는, 화해의 사상이다(고후 5, 11; 로마 5, 8장). 바울로는 인간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보고, 인간을 하느님 앞에 선 존재로 보았다. 그러나 인간은 이 관계를 끊음으로써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의 구원은 바로 이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일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사이를 화해시키는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과 하느님의 사이에 막힌 담이 헐리고 그와 정상적인 교류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상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가 인간의 편에서 인간을 위해 제물이 됨으로써 하느님의 노여움을 풀어주었다는 것이 아니다. 바울로에게서는 그러한 사상을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일은 인간의 편에서, 나아가 서는 예수의 죽음 자체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아니, 그것은 하느님의 일방적인 행위, 오직 그의 선물로서 하느님 자신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와 화해한 것이라고 한다.

둘째로, 이 사건은 인간을 모든 것에서 자유스럽게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라고 할 때 그것은 당시의 그리스, 로마시민의 자유와 대조를 이룬 노예제도와 관련이 있다. 그리스에서의 자유란 막연한 개념이 아니라 폴리스(Polis)와 관련이 있다. 폴리스에 속한 시민은 폴리스에서의 의무를 수행했을 때 모든 권리를 향유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이 폴리스의 시민인 한은 그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못한다. 폴리스에는 물론 자유를 구속할 수 있는 질서가 있다. 그러나 시민된 자는 그 질서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 길은 제가 결정한다. 이 같은 모델이 서구에 있었다.

봉건사회에서는 봉건주 가족 외의 모든 노동자들은 봉건주에게 예속되어 전 생(生)과 노동을 봉건주를 위해 바쳐야 했다. 그런데 상업이 발달하여 자주적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계층이 시(市)를 형성했다. 그 시에서 시민권을 얻을 만큼 경제력을 가진 자는 봉건주의 예속에서 탈출해서 시에 들어감과 동시에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인에 대해서 노예가 있다. 생사여탈권이 주인의 손에 있는 노예! 그의 손과 마음을 묶고 있는 쇠사슬은 한 인간으로서의 그의 죽음을 뜻하며, 그것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으로 선언된다는 것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황홀한 구원의 표상이 될 수 있었다.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을 얽어맨 모든 것, 그를 죄인으로 고발하는 고소장 따위가 완전히 불에 태워짐으로써 과거의 일체의 것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한다(갈라 5, 1~15). 그는 무엇보다도 '하라, 하지 말라'로 된 율법에서의 자유,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규정된 죄에서의 자유를 생각하였다.

셋째로, 바울로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사건을 하느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사건이라고 한다(갈라 4장; 로마 8장). 그런데 이 아들이 된 것은 아들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들로 인정하고, 아들로 입양(入養)했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아들은 아들이지 종이 아니다. 그는 상속받을 권리를 가진 아들이다. 여기서 바울로는 십자가의 뜻은 소극적인 뜻만이 아니고 적극적인 면, 즉 과거에서 해방된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삶의 길이 열린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새로운 삶,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이것은 자유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다. 종은 영원히 종이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의무를 충실히 다하여도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아들 됨을 통하여 자유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결국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게 된다.

넷째로, 이 사건은 인간을 의롭게 했다. 의롭다는 것은 유다교에 있어서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의롭다'함은 사람의 편에서 보면 하느님이 기뻐할 만한 자격을 갖추는 일이며, 하느님의 편에서 보면 그의 완전무결성의 관철을 뜻한다. 유다인은 율법을 지키는 공로에 의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했으며, 그 길만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바울로는 의롭게 된다는 것은 인간에게 어떤 공로가 있거나 그럴 만한 자격이 갖추어졌다는 뜻으로 말하지 않는다. 아니, 사람은 여전히 죄인이다. 그는 하느님 앞에 '나다!'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의롭다고 인정했다는 것이다. 즉,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의인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바울로는 예수의 죽음이 인간의 질(質)을 상승시켰다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아니, 십자가는 하느님의 의(義)의 철저한 관철이다. 즉, 하느님의 의가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의 불의를 무(無)로 돌려버렸다는 것이다.

아무런 공로 없이, 아니,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하느님이 스스로를 인간에게 내맡김으로써 새로운 창조물로 만든 이 사건!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런 증언과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저 유명한 아담―그리스도 유형론이다(로마 5, 12~21). 바울로는, 한 사람(아담)의 범죄(불순종)로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인간은 모두 죄의 영역에 들어선 것인데 한 사람의 의, 즉 순종(십자가처형)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아담이 개인의 이름 같으면서도 그것이 사람이라는 집단개념이듯이, 그러므로 그의 범죄가 전인류라는 집단에 연쇄적 운명을 갖다준 것이라면, 그리스도는 한 사람이나 그것도 집단성이 있기에 전인류에게 연쇄적으로 새로운 길을 열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을 그대로 승인하고 '옳습니다' 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율법주의에 젖은 바울로에게는 너무나 엄청난 충격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그는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을 황당무계한 것으로 보고 그 박해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사실을 전폭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부활 : 바울로에게 결정적 전환을 가져온 것은 부활한 예수를 경험한 사건이다. 바울로는 스스로 예수 부활의 목격자로 자부한다(고전 15, 8).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체험했는가? 그것에 관해서 사람들은 사도행전에 세 번씩(사도 9, 1~922, 4~1126, 9~18) 서술한 얘기를 알고 있으며, 그것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을 종합하면 바울로가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 박해의 선봉에 나섰고, 스데파노 순교의 현장에 있었으며, 그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박멸을 위해 대사제의 공문을 갖고 다마스커스에 집결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일행을 이끌고 가던 도중에 "사울아, 사울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누구냐"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 차례의 서술에는 모순도 차이도 있다. 9장에서는 같이 가는 사람들이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하는데(7절), 22장에서는 사람들이 빛을 보면서도 소리는 듣지 못했다(9절)고 한다. 26장에 나타난 부활한 예수의 지시는 유례없이 길다. 그런데 무엇보다 문제 되는 것은 바울로 자신이 부활한 예수에 관해 그렇게 상세히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부활경험과 관련된 회심의 기록으로서 학자들은 필립비서 3장 4~9절과 갈라디아서 1장 11~18절을 지목한다. 이 두 곳은 그가 그리스도의 사도 된 경위를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활경험과 회심의 동기에 대해서는 역점을 두어 밝힐 법한데도 그 안에서는 다마스커스 도상의 얘기가 없다. 갈라디아서에 "아라비아로 왔다가 다시 다마스커스로 돌아왔다"는 것에서 그가 다마스커스에 갔었다는 전제가 있고, 그리고 "하느님의 교회를 무자비하게 박해했고 그것을 아주 없애버리려고 했다"(필립 3, 6)는 서술이 있으나, 예루살렘에서 스데파노 순교현장에 있었다는 말도 없거니와 도대체 그전에 예루살렘에 간 것 같지도 않다(갈라 1, 22). 이 두 곳에서 예수의 부활 경험을 나타낸 구절로는,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그 아드님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려고 내게 아드님을 계시해주셨습니다"(갈라 1, 16)와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필립 3, 10) 정도다. 여기서 계시했다거나 부활의 권능을 알았다는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그 경험이 바울로의 반생을 완전히 버리게 하고 새로운 삶의 출발을 하게 한 엄청난 사건으로서,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경험이었음은 틀림이 없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의 부활을 알고"라고 한 다음을 이어 "그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여 그가 죽으신 모양대로 죽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의 부활에까지 이르려는 것이다"(필립 3, 10)라는 구절이다. 여기서 바울로는 부활을 그의 죽음과 결부시킨다. 이것은 부활은 십자가사건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 한 사건의 양면임을 나타낸다. 다른 말로 하면 부활경험은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계시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로는 십자가와 부활을 함께 말하는 경우도 많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말하는 것으로 부활사건까지 포함시키는 경우가 많다(고전 1, 232, 2; 갈라 3, 1). 그는 단순히 "십자가의 도(道, logos)"라는 말로써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총괄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 그는 주저없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전 2, 2)고 한다. 부활경험이 그의 전환의 결정적 사건이라면 부활을 뺀 십자가만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바로 그 부활경험의 내용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가 계시됐기 때문에 또 십자가만 알면 된다는 그 사실은 실은 부활경험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바울로에게는 그리스도의 고난(십자가)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었다. 그는 부활경험에서 죽음의 극복을 경험했다. 그러므로 그의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그의 죽음에 참여한다는 말이며, 그것이 확실할 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합니다(고전 15, 55~57).

죽음은 죄와 율법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는 이 죄와 율법의 끝을 가져왔다. 그러니 죽음 그것은 이미 과거의 것이고, 이제부터는 삶의 길만이 열려 있다. 이러한 신앙이 바울로로 하여금 죽음을 향해 마치 패잔병을 호령하듯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로는 영지주의자(Gnostic)는 아니다. 즉 예수의 죽음이 내 죽음이었음을 깨닫는(覺) 순간 이미 죽음을 깬(破) 것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다. 아니, 삶으로 참여할 때만 자기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그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음을 거듭 천명한다(필립 3, 10~11; 고후 4, 10~11). 그는 그리스도가 죽은 것처럼 죽기를 원했다. 그는 그런 길을 걸은 것이다. 그는 "앞으로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시오. 내 몸에는 예수의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갈라 6, 7)라고 하는데, 그 예수의 낙인은 다분히 박해로 육체에 남은 어떤 흉터 같은 것이었으리라(「그리스도의 낙인」, 『현존』 49호). 그래서 루가가 그의 마지막 길을 거의 예수의 경우와 흡사하게 서술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참고문헌

전경연, 「바울의 옷의 은유와 사관―고후 5, 1~10 연구」, 『現代와 神學』 제7호(1974).

정명현, 「바울의 구원관」, 『로고스』 제24호(1 977. 2).


|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List of Articles
표지
증보판에 부치는 말
머리말
       
제1부 고전(古典)으로서의 성서
       
제1장 고전의 의미
    1. 인류와 고전
    2. 현대인과 고전
제2장 성서의 특성
제3장 성서를 보는 눈
제4장 성서에서 보여주는 역사의 주체
제5장 성서의 자료와 편집
       
제2부 약속을 믿고 산 민족사 : 구약
       
제1장 한 책의 민족 이스라엘
제2장 인간사 서장
    1. 창조된 세계와 인간(아담)
    2. 잘못 출발된 역사
제3장 도상의 나그네
    1. 족장들
    2. 탈출의 족장 : 아브라함
    3. 하느님과 겨룬 사나이一야곱
제4장 엑소더스
    1. 히브리
    2. 모세
    3. 하느님과의 계약
    4. 십계명
제5장 종족공동체의 형성
    1. 가나안 정착
    2. 이스라엘 종족동맹
    3. 판관들
        1) 판관 삼손(판관 13~16장)
        2) 판관 기드온(판관 6~8장)
제6장 왕국시대
    1. 왕권과 국가
    2. 다윗왕조
    3. 왕국시대
        1) 솔로몬 왕
        2) 분단 200년
제7장 예언자
    1. 예언자의 현장
    2. 찬양과 저주一나단
    3. 왕권과의 대결자一엘리야
    4. 종교보다 정의를一아모스
    5. 남은 무리 一이사야
    6. 심판과 새 가능성 一예레미야
    7. 해골의 부활一에제키엘
    8. 너 위한 수난一이름없는 예언자
    9. 예언자의 말의 성격
    10. 과거, 현재, 미래
   
제3부 새로운 개벽 : 신약
   
제1장 예수의 사건
    1. 예수의 시대상
    2. 역사와 해석자
    3. 예수의 선포
        1 ) 하느님 나라의 초대
        2) 낡은 질서와의 대결
    4. 예수의 행태
        1) 무슨 권위로
        2) 예수와 민중
    5. 십자가 처형
    6. 갈릴래아에서 만나자一부활사건
제2장 예수운동의 전진(사도행전)
    1.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민중운동
    2. 이스라엘 민중운동의 목표와 사상
    3. 민중사실
제3장 바울로의 삶과 증언
    1. 그의 삶
        1) 바울로의 위치
        2) 민중사건에 항복한 사울
        3) 바울로의 연대기
    2. 바울로의 증언
        1) 인간세계 심판
        2) 사람됨의 조건
        3) 죽음에서의 탈출
    3. 그리스도와 역사
    4. 자유인의 길
        1) 앞을 향해 달리는 삶(필립 13,1~14)
        2) 하느님 앞에 선 존재 (갈라 4, 1~10)
        3) 이웃과 더불어의 존재
    5. 바울로의 민중론
        1) 고린토교회의 사회계층
        2) 민중을 보는 바울로의 눈
        3) 택함을 받은 민중
    6. 바울로의 수난기
        1)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2) 예루살렘에서
        3) 문제점들
        4) 바울로는 ‘정치범’이 아닌가
        5) 예수의 수난사와 바울로의 수난기
제4장 요한의 증언
    1. 요한복음의 특이성
        1) 공관서와의 관계
        2) 요한의 정신적 풍토
        3) 예수의 새 해석
    2. 개벽의 선언
    3. 갈림길
제5장 박해와 희망(계시록의 신앙)
    1. 묵시문학의 성격
    2. 로마제국과의 대결
    3. 결단할 때
    4. 영원의 노크
    5. 마라나타
한국어로 된 성서 연구 참고문헌
전집간행에 부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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