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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1) 앞을 향해 달리는 삶(필립 3, 1~14)

형제들이여, 나는 아직 그것을 잡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온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느님께서 위로 향하여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얻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뿐입니다(필립 3, 13~14).

바울로는 두 관점에서 자기를 말하고 있다. 하나는 과거 속의 자기와 다른 하나는 미래(오고 있는 것) 속에서의 자기인 것이다.

과거에는 자랑스러운 것이 많았다. 그는 본문 4절에서부터 "만일 어떤 다른 사람이 육신에서 신뢰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라고 전제하고, 가장 전통적인 혈통과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율법에 있어서는가장 모범적인 종교인이었고, 불의(不義)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한 투쟁에는 열심이어서 기독교의 박해에도 선봉에 나섰던 이력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자기의 과거를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런 것을 '해(害)로 여길' 뿐 아니라 '배설물'로까지 생각한다고 한다. 이것은 과거에서 탈출하려는 자기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발전된, 어떤 더 높은 차원에서 볼 때에 과거의 자기가 유치하게 보여서가 아니다. 아니, 그 과거가 계속 자기에게 도전하고 또는 자기를 포로로 하려는 데 대한 결단의 선언이다.

노자(老子)는 "공을 이루었으면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功成而不居)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과거에서 떠남으로써 오히려 그 과거를 오래 빛낼 수 있다는 뜻에서 여전히 과거에 안주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바울로는 과거(업적)로부터의 철저한 탈출을 말한다. 이것은 과거로 되돌아가기 위함이 아니라 앞의 것을 향해 달리기 위해서이다. 그 앞의 것을 표현해서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나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의",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 등등의 여러 가지 표현을 한다. 그는 참 '나'를 과거나 과거의 업적에서가 아니라 오고 있는 미래에서 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그는 참 나는 "그리스도 안"에, "그를 믿음"에서, 그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찾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바울로가 과거를 버렸다는 것은 과거에서 얻은 것들을 버렸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그는 과거에서 얻은 것들을 버려야만 했던가? 버릴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겨야만 했던가? 그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자기는 살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런 것들이 자기의 삶의 보장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는 그러한 생각에서 자기가 속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에서 얻은 모든 것이 그것이 주어진 것이든 노력해서 얻은 것이든지 간에,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았다. 히브리인이 되었다는 사실, 바리사이파에 속했다는 사실, 또는 율법을 지켰다는 사실이 자기의 삶을 보장하는 것이 아님을 안 것이다. 가진 것이 바로 '나'일 수는 없다. 존재의 문제는 내가 무엇을 가졌다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이다. 아니, 존재한다는 것은 가졌다는 것 이전의 문제다. 그런데 가진 것이 마치 자기 삶 자체인 것처럼 거기에 안주하고 있는 동안 그는 자기 존재를 묻지 않음으로 해서 자기를 상실한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를 보장한다고 생각했던 그런 것들이 실은 나를 잃어버리게 하고, 이미 있는 것들에 나를 적응시킴으로써 오히려 나는 나의 참 현실을 잃어버렸음을 깨달았을 때 바울로는 그가 이미 가지고 있던 것들을 마치 배설물처럼 버린 것이다. 여기서 잠시 그의 결단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인간존재 이해와 그리스의 인간관을 비교해보자.

그리스의 인간관은 '코스모스'(cosmos)라는 개념에서 결정된다. 코스모스란 있는 것 전체를 표현한 개념이다. 그것은 있어야 할 것은 이미 다 갖추어전, 그 자체로서 이미 완결된 질서이다. 이것이 질서 정연하게 제 궤도를 돌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영원한 법칙이다. 이 법칙은 하나의 거대한 기계처럼 계속 반복하면서 모든 만물을 생성, 소멸하게 한다. 인간은 이 우주에 속한 한 존재이다.

그리스에서 인간은 특별한 존재라고 한다. 그것은 인간이 영원한 법칙을 알 수 있는 누스(nous), 즉 이성(理性)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성은 본질상 영원한 우주의 법칙과 일치한다. 그래서 인간을 '소우주'(小宇宙)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사실상 인간은 곤충이나 초목과 본질상 다를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도 이 영원한 우주의 법칙에 의해서 제자리가 주어졌고, 그것에 따라서 자기를 적응시킬 때에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저들의 모든 신들도 마찬가지다. 비록 신이라 해도 이 영원한 법칙에 예속되어 있으며, 그 아래 제자리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단지 기능상의 차이뿐이다.

여기서 인간이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는 자명해진다. 즉 주어진 이성으로 이 영원한 법칙을 앎으로써 제자리를 알고 다른 존재하는 것과 조화를 이루어가면 자동적으로 자기의 궤도를 따라 돌게 된다. 여기서 삶이란 곧 발견(Entdeckung), 기술(Technik)이 된다. 사는 것은 바로 이 법칙을 찾아서 그것에 조화되는 일이다. 이 점에서는 사람과의 관계도 같다.

저들이 도덕을 '테크네'(techne), 기술이라고 하는 것처럼 사람과의 관계도 법칙에 따라서 조화를 이루는 기술이다. 따라서 우주의 법칙만 알면 삶은 수수께끼가 아니고 스스로 분명해진다. 거기에는 모순이란 있을 수 없다. 있다면 이 법칙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오는 것일 따름이다. 자기 현존을 전체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자기를 다른 자연물처럼 객관화해서 이해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나를 전체의 한 예로 취급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나의 삶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원한 법칙이 돌아가는 과정의 현상이고, 결코 고유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내가 마주선 '너'도 전체의 한 예에 불과하며, 산 주체가 될 수 없다. 이런 이해에서 사랑을 말한다 해도 어느 특정한 사람을 향한 특유한 사랑이 있어서는 안 되고 소위 '박애'(博愛)만이있어야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너'니 '나'니 하는 구체성(역사성)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질 현상이고, 있는 것은 영원한 법칙뿐이다. 이런 마당에서 '나'니 '너'니 하는 구체적인 존재나 '지금'이라는 역사적 현실은 의미가 없다. 의미가 있다면 이런 다양한 현상을 통해서 그 영원한 법칙을 발견하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인간관계에서는 저들이 자유를 말할 때에도 바로 '나'니 '너'니, '이때'니 '저때'니 하는 구체성에서의 해방을 뜻한다. 따라서 자유란 개체로서의 내가 궁극적인 영원한 법칙에 몰입하는 일이 된다. 따라서 여기서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라는 구체적인 것, 개체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전체 속에 흡수되는 나의 비역사화이다.

이러한 인간관에서 보면 지금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한 원형으로 된 영원히 돌고 도는 쇠사슬의 한 고리이다. 이 안에서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며, 내일은 오늘의 연속일 것이다. 내일이라고 달라질 새로운 것은 없다. 있다면, 이미 있는 것의 발견 또는 그것의 발전일 뿐이다. 따라서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필연일 뿐이고,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이 말은 사건이란 없다는 말이다. 법칙만이 있는데 무슨 사건이 있겠으며, 자유가 없는데 우연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신들도 인간도 곤충도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국 이 법칙에 자기를 적응하는 길뿐이다. 영원히, 영원히!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바울로의 주장은 웃음거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자기 편에서 보면 과거에서 손을 떼었는지 몰라도 과거는 여전히 그의 목덜미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갔다고 해야 말뚝에 매인 짐승이 그 매인 줄의 길이만큼 나가보는 것 이상이 아니다. 즉 과거의 줄의 길이만큼 나가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바울로는 분명히 과거에서의 탈출을 선언한다.

"나는 가졌다. 이것은 내가 살고 있는 증거다!" 이처럼 생각해서 가진 것을 소중히 알고 거기에 눈을 돌리고 있는 한 "나는가졌다. 그런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정착되어버린다. 그랬기에 이전의 바울로는 그가 가진 것을 자랑함으로써 자기 삶을 시위했다. "너는 무엇을 가졌느냐? 나는 그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가졌다!" 즉 남과 비교해서 더 많이 가진 것에서 보람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가진 것과 내가 별개의 것임을 깨달았을 때 그는 그런 것들을 버렸다. 가진 것을 버렸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나와 가진 것은 유리될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린 것이다.

그러나 바울로는 버리는 일 자체를 오래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그가 곧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만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또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이런 것들을 버렸다고 한다. 그러면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찾았기 때문에 또는 그 안에서 자기를 찾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버렸나? 아니, "얻으려고", "발견 되려고" 해서다. 아직 그런 현실에 돌입한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하게, "나는……이미 얻었다는 것도 아니요, 또 이미 완전해졌다는 것도 아닙니다. 또는 그것을 잡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라고 거듭거듭 말한다. 그러면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는 지금 가진 것이 없다. 다만 버리고 얻으려는 그 틈에서, 탈출하고 향해 가는 그 순간에서 있다. 그는 이러한 존재의 모습을 똑똑히 밝혀 "오직 한 가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온몸을 앞으로 기울여"라고 했다. 즉 그는 도상에 있는 존재(Unterwegssein)이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삶의 길은 이스라엘의 역사 중 아브라함의 행태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고향과 친척을 떠나, 미지(未知)의 세계를 향해 계속 앞으로 가고 있었다. 그것은 출애굽의 히브리 집단의 모습 그대로다. 전체적으로 이스라엘의 민족사는 한 인간의 삶을 확대하여 그 존재의 모습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고, 이스라엘 전체의 역사를 아브라함이라는 한 개인에게 압축시켜 묘사하는 것은 주목해볼 만하다. 따라서 여기서 바울로의 이 자전적 서술은 그런 점에서 결코 그 개인의 길이 아니라 인간들이 사는 길을 제시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에서부터 탈출해야 한다. 그러면 가난해지고 그 자체에 보장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불안하게 된다. 그러나 가진 것으로 사느냐, 또는 나로서 사느냐의 두 갈림길에서 결단함으로써 비로소 자기를 찾게 된다.

삶은 사건이다! 바울로는 나로서 살기 위해 과거를 버리고 단지 새로운 가능성으로만 열려진 '모험의 길'에 뛰어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집내지 않는다. 그는 바로 이 새로운 가능성에 자기를 내맡길 때에만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는 끝끝내 잡았다거나 찾았다는 말을 쓰지 않고 아직도 앞의 것을 향하고 있는 자기만 말하는가? 여기에는 이유가 없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가령 사랑을 예로 하여 볼 때도 어떤 사람은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할 수 없는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는 이만하면 되었다 하는 것이 없다. 거기에는 '이미'(already)가 아니라 '아직도 아니'(not yet)가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이미 이루어진 것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곧 거기서 탈출하여 앞으로 향한다. 사랑에는 이미(과거) 이런 일이 있었으니 앞으로 으레 이렇게 발전할 것이라는 연속성이 없다. 만일 이미 된 일에 머물러 있으면 벌써 그 사랑은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현존성(現存性)이 그렇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간은 관계의 존재이기 때문에 나 홀로 이만하면 됐다는 상태가 있을 수 없으며,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에 한 시점에 정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로는 "아직" 자기는 그를 못 잡았다고 하면서 "그리스도 예수는 나를 잡으셨습니다"라고 한다. 그는 무엇인가에서 확신을 얻었다. 적어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러나 그런 확신에 머무르지 않는다. 아니, 그에게는 여전히 '아직도 아니'이다.

우리는 '그가 잡는다'는 말을 '소유한다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그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그것은 '만난다'(begegnen, encounter)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참 만남은 어느 과거에 안주할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아직도 아니'이다. 즉 계속적으로 오고 있는 사건이다. 사랑이나 만남에는 '저장'이란 없다. 이처럼 참 현존도 언제나 가진 것을 저장하지 않고 미래를 향한다. 그럼에도 공허에서 절망하지 않게 되는 것은 '만나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순간적으로 나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평소에 자랑스럽게 생각되던 내가 가진 것들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되어버림과 동시에 자신만만하던 내가 삶이 공허 자체처럼 보이는 경험을 한다. 이것은 내가 가진 것들과 내가 유리된 것을 발견할 때이다. 그때 내가 가진 것이 나를 전혀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체험하는 것은 굳게 차단된 현존에 대한 노크 소리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노크 소리는 나를 절망 속에 추락하게 할 수도 있고,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게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노크 소리를 통하여 비어 있는 현존을 발견했을 때 당황하여 다시 과거의 유산을 붙잡으면 나는 인간으로서 존재함을 포기하고 그저 살아가는 자연의 한부분인 '현재'에 머물고 말 것이며, 바울로처럼 온몸을 기울여 앞의 것을 향하여 달리면 새로운 존재의 가능성으로서 현존하게 될 것이다.


|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List of Articles
표지
증보판에 부치는 말
머리말
       
제1부 고전(古典)으로서의 성서
       
제1장 고전의 의미
    1. 인류와 고전
    2. 현대인과 고전
제2장 성서의 특성
제3장 성서를 보는 눈
제4장 성서에서 보여주는 역사의 주체
제5장 성서의 자료와 편집
       
제2부 약속을 믿고 산 민족사 : 구약
       
제1장 한 책의 민족 이스라엘
제2장 인간사 서장
    1. 창조된 세계와 인간(아담)
    2. 잘못 출발된 역사
제3장 도상의 나그네
    1. 족장들
    2. 탈출의 족장 : 아브라함
    3. 하느님과 겨룬 사나이一야곱
제4장 엑소더스
    1. 히브리
    2. 모세
    3. 하느님과의 계약
    4. 십계명
제5장 종족공동체의 형성
    1. 가나안 정착
    2. 이스라엘 종족동맹
    3. 판관들
        1) 판관 삼손(판관 13~16장)
        2) 판관 기드온(판관 6~8장)
제6장 왕국시대
    1. 왕권과 국가
    2. 다윗왕조
    3. 왕국시대
        1) 솔로몬 왕
        2) 분단 200년
제7장 예언자
    1. 예언자의 현장
    2. 찬양과 저주一나단
    3. 왕권과의 대결자一엘리야
    4. 종교보다 정의를一아모스
    5. 남은 무리 一이사야
    6. 심판과 새 가능성 一예레미야
    7. 해골의 부활一에제키엘
    8. 너 위한 수난一이름없는 예언자
    9. 예언자의 말의 성격
    10. 과거, 현재, 미래
   
제3부 새로운 개벽 : 신약
   
제1장 예수의 사건
    1. 예수의 시대상
    2. 역사와 해석자
    3. 예수의 선포
        1 ) 하느님 나라의 초대
        2) 낡은 질서와의 대결
    4. 예수의 행태
        1) 무슨 권위로
        2) 예수와 민중
    5. 십자가 처형
    6. 갈릴래아에서 만나자一부활사건
제2장 예수운동의 전진(사도행전)
    1.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민중운동
    2. 이스라엘 민중운동의 목표와 사상
    3. 민중사실
제3장 바울로의 삶과 증언
    1. 그의 삶
        1) 바울로의 위치
        2) 민중사건에 항복한 사울
        3) 바울로의 연대기
    2. 바울로의 증언
        1) 인간세계 심판
        2) 사람됨의 조건
        3) 죽음에서의 탈출
    3. 그리스도와 역사
    4. 자유인의 길
        1) 앞을 향해 달리는 삶(필립 13,1~14)
        2) 하느님 앞에 선 존재 (갈라 4, 1~10)
        3) 이웃과 더불어의 존재
    5. 바울로의 민중론
        1) 고린토교회의 사회계층
        2) 민중을 보는 바울로의 눈
        3) 택함을 받은 민중
    6. 바울로의 수난기
        1)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2) 예루살렘에서
        3) 문제점들
        4) 바울로는 ‘정치범’이 아닌가
        5) 예수의 수난사와 바울로의 수난기
제4장 요한의 증언
    1. 요한복음의 특이성
        1) 공관서와의 관계
        2) 요한의 정신적 풍토
        3) 예수의 새 해석
    2. 개벽의 선언
    3. 갈림길
제5장 박해와 희망(계시록의 신앙)
    1. 묵시문학의 성격
    2. 로마제국과의 대결
    3. 결단할 때
    4. 영원의 노크
    5. 마라나타
한국어로 된 성서 연구 참고문헌
전집간행에 부치는 말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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