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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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택함을 받은 민중

by 운영자 posted Sep 0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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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택함을 받은 민중

우리는 한 사람이나 그 사상을 평가할 때 시대적 조건을 계산에 넣지 않고 현대로 직접 끌어와서 평가해서는 안 된다. 특히 역사적 평가는 그 시대에서 얼마나 전진 또는 후퇴했느냐 하는 관점에서 해야 한다. 따라서 바울로를 산업사회의 척도에서 비판하는 것은 잘못 된 것이며, 또 그의 주장을 오늘과 직결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받아들이려는 것도 무모한 것이다. 우리가 물을 것은 바울로의 투쟁의 일차적 대상이 무엇이었는가를 묻고, 거기에서 그의 한계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전제에서 바울로의 민중관을 평가해야 한다.

이미 지적한 대로 그가 총력을 집중한 것은 어떻게 역사의 예수를 소개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면 이미 케리그마화한 그리스도를 그가 선 사회의 시대언어로 바꾸어 선교함으로써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공인된 종교로 인정받도록 뿌리를 내리게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예수와 그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팔레스틴의 민중과 더불어 그들의 친구로서 도래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역사의 질적 전환과 그 앞에서 저들의 권리를 의식화시켰다. 이에 비하여 바울로는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종교공동체를 어떻게 기존문화권에서 공인받도록 하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노력은 변증론(apologetic)적 구원론 내지 그리스도론 전개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위해서 우선 탈유다화하는 일과 동시에 헬레니즘 영역에서의 토착화가 중요했다.

그런데 이 과제를 수행하는, 그가 대표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은 하류층, 즉 민중이 중심이다. 이 점에서 예수를 따르던 민중과 다름없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예수의 민중은 농어촌의 민중으로 민족공동체에서 소외된 계층인데 대해서, 고린토의 민중은 도시의 민중으로서 노예 출신, 로마정권에 의해서 추방당해 전전 하며 이 지역에 정착하려는 자들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예수의 민중은 계층적으로 완전 소외된 채 자기들끼리 몰래 살거나 몰려 다니지만 고린토의 민중은 다른 계층과 공간적으로 공존해야 할 처지에 있다. 그러므로 고린토의 민중은 예수의 민중보다 서로 긴장하고 충돌할 가능성이 오히려 더 많다.

그러므로 바울로는 이 같은 현실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을 거듭 강조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과 유다인, 자유인과 종, 남과 여의 차이가 없다든지, 새로운 피조물은 모두 자유롭다든지, 한 몸의 지체와 같다는 점 등을 강조하며 화해의 복음을 전하고 사랑의 설교를 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가난한 자, 약한 자, 비천한 자, 즉 민중을 변호하며 적어도 신학적으로는 그들을 상위(上位)에 둔다. 이 점에서 바울로는 당시의 그리스적 인간평가에 역행한다. 그런데 바울로의 변호의 논리는 민중 자체에 있기 이전에 그리스적 가치관과의 싸움의 일환이였다. 가령 그가 그리스인은 지혜를 구하나 우리는 저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며, 그리스인이 숭상하는 지혜에 대해 애초부터 포문을 열고(고전 1, 18 이하), 그 같은 범주 안에서 '어리석은 민중'을 변호한다. 그러나 공관서 특히 '마르코'의 민중과는 다른 점이 있다.

마르코는 표류하는 '밖의' 민중을 말하는데 대해, 바울로는 '안에 들어온' 민중만을 말한다. '안'이란 그리스도교의 안인데 구체적으로는 교회의 일원이 된 민중이다.

또 마르코는 민중을 지도계급과 대립시킨 데 대해서, 바울로에게서는 그런 강조점이 없다. 바울로도 강자와 약자, 지혜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 등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이것은 같은 집단 안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교회라는 집단을 한 몸으로 비유하고 각기의 기능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약하고", "흉하고", "변변치 못한" 부분을 "귀한 것", "아름다운 것"과 비교시키는 것과 같다. 바울로가 "약한 자", "미련한 자" 등을 선택해서 강자, 배운 자를 무력하게 한다고 한 부분도 "약하다고 보이는 부분의 지체가 오히려 요긴하다", "흉한 것들을 더욱더 아름답게 꾸민다", "변변치 않은 지체들을 더욱 귀하게 다룬다" 등의 관점과 상통한 데가 있다.

한편 마르코는 정치경제적인 체제에서의 소외 내지 피압박자를 민중으로 본 데 대해서, 바울로에게서는 그 점을 의식화시킨 흔적을 볼 수 없다. 단지 사회적인 측면에서 멸시받는 것을 옹호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민중 자체를 위한 변호가 아니라 그리스도교 집단을 변호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고 뚜렷한 선언과 신념이 있다. 그것은 세상이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하는 층, 권력권에서 밀려난 자 그리고 신분적으로 비천한 자들을 하느님이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그들을 선택한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동등한 하나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라는 것이다(고전 12, 12 이하, 특히 24절). 여기에서 우리는 새 사회를 창조하는 역사적 주역은 바로 민중이라는 말로 바꾸어 받아들 일수 있다.

참고문헌

호크, R. H., 전경연 역, 『바울 선교의 사회적 상황』(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전경연, 『고린도 서신의 신학논제』(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타이센, G., 「고린도 교회의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 『사회학적 성서해석』(한국신학연구소,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