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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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예루살렘에서

by 운영자 posted Sep 0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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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入城) 바울로를 "형제들이 기쁜 마음으로……" 맞아주었다. 그런데 그는 우선 아직도 '유다교 안의 그리스도교'라고 생각하여 유다교의 전통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야고보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층을 방문한다. 거기서 그는 그 지도층의 인정을 받으나 교회내의 유다인 그리스도인들이 바울로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다는 이유로 바울로에게 그 자신이 반(反)율법, 반(反)성전적이 아님을 행위로 보이도록 권유하는데, 바울로는 그 지시에 따른다.

그러나 바울로는 유다주의 골수분자들의 선동으로 성전에서 군중들에게 성전 밖으로 끌려나온다. 그 장면은 "온 도시가 소란해지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바울로를 붙잡아 끌고 성전 밖으로 나가자 성전 문이 곧 닫혔다"(사도 21, 30)고 서술한다. 그리고 바울로는 그들에게 난타당한다.

이때 로마군의 연대장급인 천부장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바울로를 먼저 격사슬'로 결박한 후에 그에 대한 자초지종을 묻는다. 그러나 고발은 중구난방이고 저들은 바울로를 때려죽이려는 기세이기에 그 천부장은 군인들에게 그를 병영으로 데려가도록 했다. 그 이유는 그를 그 폭도들에게서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사도 21, 35 이하). 한걸음 나아가서 그는 바울로의 요청대로 자기 해명의 기회를 주는 데, 바울로는 주로 그가 유다교에 충실했다는 것과 그리고 예수에게 개종한 과정을 얘기하는데, 유다교와의 모순은 전혀 없는 것처럼 얘기하고, 또 로마군에게는 전혀 들을 필요도 없는 내용을 말한다.

그러나 바울로의 설교 도중 유다 군중의 분노의 함성이 높아지자 그를 다시 병영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것은 보호를 목적으로 했을 것인데 모순되게도 그를 채찍질하고 가죽끈으로 결박해두었다가 다음날 그의 죄상을 알기 위해 유다 민족 공의회인 산헤드린을 소집한다. 그러나 고소는 없고 바울로의 연설이 시작된다. 바울로의 선교의 핵심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고, 그것 때문에 고소당한다고 한다. 이로써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가이파와 부활을 믿는 바리사이파 사이에 격론 내지 격돌이 일어나는데, 바리사이파가 바울로의 편에 선다. 그 틈에 바울로가 찢길 위험이 있어 천부장은 그를 다시 병영으로 끌어 들인다.

그런데 바울로를 죽이려는 '결사대'(40명)가 그를 호송 도중에 가로챌 것이라는 정보를 들은 로마의 천부장은 그날 밤에 대병력으로 그를 옹위, 총독 펠릭스(Felix, A.D. 52~60년 재임)에게 그가 무죄라는 편지와 함께 인계한다.

펠릭스는 그를 감옥이 아니라 '헤로데 관저'에 연금해두었는데 닷 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스(Ananias, A.D. 48~58년 재임)가 친히 변론자를 비롯한 몇 사람을 동반하여 총독 주재지인 가이사리아로 가서 바울로를 고소하였다. 그 내용은 한마디로 집약해서 말한다면, "이 사람은 염병 같은 자요, 온 천하에 있는 모든 유다 사람들을 소란케 하는 자요, 나자렛당의 괴수"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로는 율법으로 무결함과 단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설교한 것뿐임을 반복하여 말하면서 자신을 변호한다.

펠릭스는 심문을 중단하고 이송한 그 천부장이 오면 사리를 가릴 것을 선언하고 그를 다시 연금하되, "자유를 주고 친구들이 돌보아 주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한다. 그후 며칠 지나자 그는 그의 아내와 더불어 바울로를 불러 그리스도교에 대해 들으려 했는데, 바울로는 "정의와 절제 그리고 최후심판"에 대해 말했다. 성서(사도 24, 25)는 "펠릭스가 두려워했다"고 하는 간단한 서술로 펠릭스 자신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자인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펠릭스는 아무런 죄명을 밝히지 않은(못한) 채 그를 2년 동안 그대로 투옥했다가 그의 후임인 페스도(Festus, A.D. 60~62년 재임)에게 인계한다.

페스도는 그의 주재지에서 다시 예루살렘의 유다 종교지도자들의 고소에 따라서 바울로를 심문한다. 저들의 고소내용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데, 그러나 바울로는 "내가 유다 사람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카이사르에 대하여 아무 죄도 지은 일이 없다"(25, 8)고 함으로써 고소 중에 정치적 고발이 들어 있음을 간접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유다인들이 종교재판에 넘겨달라고 했으나 바울로가 로마 카이사르에게 항소함으로써 그것을 거절한다.

바울로는 우연히 온 헤로데 아그리빠(Agrippina, A.D. 27~100년) 앞에서도 심문을 받게 된다. 페스도는 아그리빠에게 바울로는 유다인들에게 종교문제로 고소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설명한 후 바울로의 말이 서술되는데, 바울로는 아그리빠가 유다 사정을 잘 알 것을 전제하고 그에게 변명하게 된 기회를 갖게 된 것을 다행으로 안다고 전제하고 그가 한 일을 보고한다. 새로운 것은 "저는 하느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에 대해서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열두 지파는 밤낮 열심으로 하느님을 섬기면서 그의 약속이 이루어지 기를 바랐을 것이다"(사도 26, 6 이하)라는 등 민족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발언을 한 사실이다.

바울로의 개종 설명 도중 아그리빠가 격분하는 장면이 있는데도 결국 페스도와 더불어 "그 사람(바울로)은 사형을 당하거나 갇힐 만한 일을 한 것이 하나도 없소"(사도 26, 31)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런데도 그가 카이사르에게 항소했으니 로마로 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울로는 결국 로마로 호송되는데 풍랑으로 많은 고난을 겪고 로마에 도착한다. 그런데 로마에서 병영에 있게 했다(사도 28, 16)는 말과 셋집에 있었다(사도 28, 30)는 혼선된 보도가 있고, 또 아무런 제재 없이 활동하는 그의 모습을 서술하는 걸로 끝나므로 그의 상소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