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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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요한의 정신적 풍토

by 운영자 posted Sep 0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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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요한의 정신적 풍토

도대체 요한복음서는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씌어졌는가? 요한 기자는 공관서를 알고 있었는가? 이런 물음이 그 정신풍토를 묻는 것과 관계된 것들이다. 요한은 마르코를 알고 있었으리라는 짐작이 우세한데 그것은 위에서 본 대로 큰 테두리가 같으며, 그리고 그 안에 언어상 단어까지 꼭 같은 것을 여러 곳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요한은 루가를 알고 있었다는 흔적도 뚜렷하다. 마리아, 마르타의 성격묘사(나자로의 죽음 얘기에 비친 마리아와 마르타의 성격과 루가 10, 78 이하의 두 사람 비교), 그리고 요한 13장 2절, 27절 = 루가 22장 3절, 13장 38절 = 루가 22장 34절, 18장 10절 = 루가 22장 30절 등에서의 공통성, 무엇보다도 예수에게 기름 붓는 마리아의 이야기(요한 12, 3 이하)는 루가 7장 36절 이하와 마르코의 것(14, 3 이하)을 결합한 흔적이 뚜렷하다. 만일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대로 그가 루가복음을 알고 있었다면 이 복음서는 빨라도 A.D. 1세기말 이전에 씌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마르코와는 적어도 70년의 시간적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왜 공관서의 예수의 자료들을 기피했을까 하는 것이다. 전에는 요한은 공관서에 누락된 것만 전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함으로써 네 복음서를 종합, 재편집해보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 그런 시도를 한다는 것은 한갓 고집일 따름이다. 요한은 분명한 다른 상황에서, 다른 삶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자료도 다 전승받았겠지만 그 삶의 현장에서 다른 눈을 갖고 예수를 해석했다는 것은 더 이상 논의할 여지가 없는 사실로 되어 있다. 그러면 어떤 상황일까?

이 문제는 아직까지 분명한 해결을 못 보았지만 다음 몇 가지 관찰에서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말은 그 상황을 반영한다. 우선 요한복음이 사용한 헬라어는 셈적 헬라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것이 원래 아람어로 된 것을 헬라어로 번역했으리라는 주장을 했을 정도다. 어떤 이들은 이 헬라어가 구약의 70인 헬라어역(LXX)의 언어와 같다고 한다. 이 지적 역시 그 언어가 히브리적으로 된 것을 헬라어로 번역했다는 말이 될 수 있으나, 히브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헬라어로 썼을 경우에도 그러한 특유의 언어가 될 수 있다. 하여튼 이런 논의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이 저자가 히브리인이면서 헬라어를 사용하는 풍토에서 이 글을 썼다는 사실이다(C. H. 닷드, R. 불트만). 그것은 70인역의 경우와 같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그 사용하는 개념과 세계관이다. 무엇보다도 요한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원적(二元的) 언어들이다. 빛과 어둠, 참과 거짓, 위와 아래, 삶과 죽음, 영과 육 등이 그런 것이다. 이것은 모두 이원론적 세계관의 언어이다. 이렇게 비교되는 두 종류의 언어들은 근본적으로 그 근원이 다르다. 이 세상에 대해서 저 세상이 있다. 보이는 것에 대해서 보이지 않는 실재가 있다. 그리고 궁극에는 악마와 하느님으로 나뉜다. 그러므로 예수는 어디선가 이 세상(육)으로 와서 활동하다가 다음 단계는 어딘가 저 세상에로 돌아간다는 것이 요한의 전제의 주체이며, 이렇게 '왔다가 가는' 과정에서 구원의 사건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런 세계관에서 예수가 아버지에게서 보냄을 받았고 아버지께 돌아간다고 하는데, 그를 생명의 물, 생명의 떡, 세상의 빛, 길, 진리, 생명 등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관은 어디서 유래하며 그런 개념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헬레니즘의 세계관이며 그 문화권에서 쓰는 언어들이다. 그중에 특히 영지주의(이에 대해서는 뒤에 서술함)에서 이 같은 세계관(언어)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헬레니즘 문화권, 특히 영지주의가 강한 영역에서 이 글이 씌어졌으리라고 본다. 그런 주장 중에는 애당초 요한을 영지주의자로 단정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이미 A.D. 2세기말에서부터 볼 수 있다. 한편 종교사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부정 못하는데 그렇다고 그를 영지주의자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풍토에 있었다고 보는데, 어떤 이들은 좀더 그 지역을 좁혀서 중동 일대의 영지주의의 정신풍토가 지배한 지역이라고 한다(Baur, R. 불트만). 이에 대해서 쿰란문서가 발견되면서부터 이 요한이 선 지역의 정신풍토는 영지주의 구조를 가진 팔레스틴의 유다 경건주의라고 하는 쿤(K.G. Kuhn)의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게 되었다. 그것에 대해서 좀더 세분된 토론이 있으나 공통점은 헬레니즘의 영지주의가 강한 풍토라는 것은 정설로 보아서 무방할 것이다.

성서의 저자들은 언제나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그 글의 독자들의 언어를 사용하려고 했다. 그것은 사변의 글이 아니고 구체적 역사 현실에 있는 사람들을 구하려는 뚜렷한 목적의식에서 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요한도 예외가 아니다. 요한은 적어도 공관서와 비교할 때 상당한 수준의 지식층을 안중에 두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만큼 그의 언어는 지적이며, 전개적이다.

그러면 이 저자는 누구인가? 한마디로 그 연대상으로 보아서 열두 사도의 한 사람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더욱이 요한복음 19장 35절에 "사실은 목격자가 본 대로 증거한 것이기 때문에 그(ekeinos)의 증거는 참됩니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지시한 '그'는 저자 자신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이 저자는 바로 가끔 그 "사랑하는 제자"라고 불린 그 목격자의 다음 세대에 의해서 씌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신약성서개론』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