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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3. 갈림길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요한 3, 17~18).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일어서고 칼이 정의보다 강하여 참도 정의도 사랑도 설 자리가 없는 이러한 현실은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의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 '칼은 칼로, 불의는 불의로'라는 역사가 반복되어 피로 물들인 것이 인간의 역사다. 인간은 더 나은 세계를 이루려고 애를 써왔다. 그러나 불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불의를 무기로 할 수밖에 없는 제한성을 가졌기에 낡은 불의를 제거함과 동시에 새로운 불의를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영원한 악순환만 계속되어야 한다. 지구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지구 위에 발을 디디고 있는 인간으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오직 지구 밖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결국에는 악순환의 인간역사의 종장(終章)을 가져오고 새 역사를 이룩할 이는 하느님 한 분뿐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상에서 가장 많은 수난을 당한 민족이다. 저들은 다른 민족에 의해서 계속적인 침범을 받음으로써 계속적으로 이방의 포로생활과 그들의 지배 아래에서 나라 없는 민족으로 장구한 세월을 신음해야만 했다. 저들은 그들 역사의 황금시대였던 다윗 왕조의 회복을 기다려왔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두 가지 이유에서 점점 흐려졌다. 하나는 저들을 점령한 나라들이 너무나 강대해서 저들을 자기들의 힘으로 물리친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과, 또 하나는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불의에 물들고 죄로 쇠잔해가기만 했다는 것이다.

예수 당시에는 세계국가인 로마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지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을 때로서, 이스라엘에는 폭력으로 이 세력을 물리치려는 운동이 여러 차례 일어났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피의 바다를 이루었으며, 그 목을 점점 졸라매는 결과만 가져왔다. 그래서 저들은 민족왕국의 재수립을 체념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져들어가고만 있었다.

그러나 저들은 절망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저들을 인도한 하느님께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저들의 믿음은 저들의 힘의 한계나 저들이 처해 있는 현상에서 좌절되지 않았다. 그 결과는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에 집착하던 종래의 신앙을 넘어서서 이 세계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경륜을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이 '묵시문학'에 응결되었다.

묵시문학은 하느님의 역사는 어떤 한 나라나 한 민족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를 심판함으로써 그 종말을 가져오게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역사는 역사 자체의 자연발생적인 과정의 결과로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올 것이다. 하늘의 별들이 낙엽처럼 떨어지고 물이 피가 되고 땅이 갈라져 불을 토하고 무덤이 입을 벌려 죽은 자들까지 살아나고, 온 인류는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온 심판자에 의해서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그 행위대로 갈라놓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의 대망의 초점은 심판자인 메시아이다. 그의 앞에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언이 바빌론 포로 당시부터 싹트기 시작해서 예수 당시에는 절정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위의 본문에서 중대한 증언을 한다. 그 내용에는 다음의 세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첫째로, 예수는 하느님이 세상에 보낸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묵시문학적인 기대를 뒤집어엎는 증언이다. 왜냐하면 그가 왔다고 하나 이 세계에는 천지이변의 드라마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구름을 타고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의 부모나 형제를 다 아는 대로(요한 6, 42)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사람과 더불어 사는 존재로 왔다. 그러나 요한의 증언은 묵시문학의 신앙의 내용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묵시문학의 말은 신화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말하자는 것은, 그는 역사의 필연으로 올 것이 아니라 역사 밖에서 역사에 개입해 온다는 것이다. 요한의 증언도 그러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히 "말씀이 육신이 된"이라는 전제를 가진다. 요한의 증언은 단지 묵시문학의 예언을 재해석함으로써 비신화화(非神話化)한 것뿐이다.

둘째로, 심판은 이미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증언도 묵시문학의 심판에 대한 상(像)과는 다르다. 저들은 심판이 초자연적인 드라마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한의 증언은 예수를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게 되었으며,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것도 묵시문학의 심판관을 재해석함으로써 비신화화한 것이다. 심판은 분명히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심판의 기준이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유다교에서는 심판은 율법이 말하는 악과 선의와 불의에 따라서 처벌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요한의 증언은 그를 믿느냐 안 믿느냐가 심판의 기준이라고 한다. 이로써 심판은 과거를 묻는 '가름'이 아니라, 미래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 되었다. 그러기에 예수는 낡은 세계를 처리하기 위해 온 이가 아니라, 새 세계를 안고 온 이이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다는 것은 그와 더불어 새 세계를 믿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고 있는 것'에 자기를 개방하는 일이다. 이에 대해서 그를 믿지 않는 것은 어둠과 죄의 세계에 그대로 주저앉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제 길을 선택한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하느님의 분노가 그에게 머무를 것이다(요한 3, 36).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 41).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 그것은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려 한 것이다(요한 12, 46).

즉 그를 믿고, 안 믿는 것으로 사람은 갈라진다. 위에서 주목할 것은 바로 '머무른다'(menei)라는 말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분노', '죄', '어둠'은 저주받은 상태를 나타낸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는 심판자인 그리스도에 의해서 새삼스럽게 마련된 상태가 아니라 이미 있는 인간의 처지이며,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로 결정하는 것은 사람 자신이다. 이에 반해서 예수의 부름에 응하는 사람은 낡은 세계의 운명을 박차고 새 세계에 참여하고 결단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두 갈림길에서 어느쪽으로 가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사람의 결단에 달려 있다. 말하자면 사람 자신에게 그의 운명의 열쇠가 주어진 것이다. 그런 뜻에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고, 그를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그것은 사람의 운명이 정말 사람의 결단으로만 결정되는 것이냐, 그 결단은 하느님과 무관하냐 하는 것이다. 가령 요한의 증언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게 허락해주신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요한 6, 44),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요한 6, 6517, 2, 6, 912, 44 비교) 등의 선언은 그에게 갈 수 있는 사람은 하느님이 허락한 사람만 가능하다는 말로 듣기 쉽다. 그뿐이 아니다. 예수는 "진리에 속한 사람"만이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하며(요한 18, 37), 그의 양만이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요한 10, 27). 이것은 사람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는 운명론이 아닌가? 우리는 교회에서 말하는 예정론(豫定論)에 익숙해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들을 곧 그렇게 생각해버리기 쉽다.

가령 바울로가 "하느님이 나를 모태로부터 선택했다"고 한 말이 있다. 사람들은 이 말에서 예정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리가 아니라, 은혜에 감격한 신앙고백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예수를 믿게 되고 그의 사도가 된 것은 내 삶의 필연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신 일이다." 이러한 고백은 은혜에 감격한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위의 말씀들을 예정설로 이해하면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위의 말씀들도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부르는 말씀이다. 따라서 예수의 부름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한 것임을 볼 수 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 그것은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있지 않게 하려 한 것이다(요한 12, 46).

하느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요한 3, 16).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보내는 초대장이다. 조건은 오직 하나이다. 그것은 믿기만 하면(If)'이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믿는 것도 하느님이 믿게 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향한 하느님의 뜻의 증언이다. 그것은 '믿으라'는 사랑의 부름을 증언한 것이다. '믿으라'고 하는 것은 구원의 초대이다. 이 이끄는 뜻이 앞서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끌려는 것은 이미 특정된 어떤 사람에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이끈다'는 것과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두 가지 사실이 아니라 동시적인 것이다. 그를 믿는 자는 동시에 이끌림을 받은 사람이다. 가령 타락한 아들과 그 아버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출가한 아들에게 아버지는, "나는 너를 무조건 용서할 터이니 어서 집으로 돌아오너라. 그렇지 않으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권고한다. 이런 경우 그 아들에게는 두 가지 길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자유만이 있다. 즉 아버지의 부름에 응하느냐 거부하느냐 뿐이다. 거부하면 아들 되기를 포기하는 것이요, 받아들이면 아들로서의 새 출발의 미래가 있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했을 경우, 그의 자유의 결단은 그의 결단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에 의해서 가능해진 결단이다. 까닭은 아버지의 부름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그 결단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끝으로 주목할 것은, 예수는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라는 선언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세계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은 저주할 자를 골라낸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심판이 되는 것은 사람이 결단해야 할 최후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과거를 기준으로 사람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는 모든 사람에게 새 세계의 문을 열고 그들을 구원으로 부를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양과 염소처럼 둘로 갈라지게 되는 것은 사람 스스로가 선택하는 데서 되어지는 일이다.

그리스도는 결코 심판하려는 이가 아니다. 이러한 증언은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더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12, 47)라는 말씀에서 철저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심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선언은 묵시문학의 심판의 표상과 충돌된다. 저들이 심판을 기다림에는 두 가지 소원이 전제되어 있었다. 하나는 율법대로 산 사람(이스라엘)이 그 보상으로서 축복을 받는 일이요, 또 하나는 저들을 억압하는 악의 세력에게 하느님이 복수해줄 것을 바라는 마음이다. 예수 당시의 유다인들은 로마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종말을 심판으로 강조하게 했다. 즉 하느님은 온 인류를 그들의 공, 죄에 따라 양과 이리를 갈라놓듯이 가르고, 불의한 자들을 처단할 것이라는 생각이 로마에 대한 복수심과 결부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세계의 종말을 가져올 그리스도가 심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바로 '이 세계'를 구원하려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면, 이날까지의 가치기준이 무너지는 것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민족적 염원에 배리되며 그들의 특권의식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판이 된다. 나자로를 죽음에서 살려놓은 사건 앞에 그를 믿는 자와 그를 죽이려는 자가 짝 갈린다(요한 11, 43 이하). 맹인이 눈을 뜨는 사건 앞에 못 보는 사람은 보게 되는데, 본다고 자부하는 자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죄 안에 그대로 머문다(요한 9, 35 이하). 자유하게 하는 현장에서 우리는 '종'이 아니라는 자부심에서 노예상태를 고수하는 자들이 있다. 이렇게 갈린다. 그것이 바로 심판인 것이다.

심판은 동시에 구원의 때를 뜻한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민족의 염원을 성취하는 이스라엘의 구주가 아니라 세계 모든 인간의 구주임이 뚜렷하게 드러나며, 동시에 그는 인간의 낡은 가치관에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이가 아니라 인간에게 하느님에 의한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 놓은 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 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그러나 거기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를 심판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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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현, 「요한복음서 주요신학 사상」, 『교회와 신학』 제23호(1991).

장상, 「요한복음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 『신학사상』 제67호(1989).


|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List of Articles
표지
증보판에 부치는 말
머리말
       
제1부 고전(古典)으로서의 성서
       
제1장 고전의 의미
    1. 인류와 고전
    2. 현대인과 고전
제2장 성서의 특성
제3장 성서를 보는 눈
제4장 성서에서 보여주는 역사의 주체
제5장 성서의 자료와 편집
       
제2부 약속을 믿고 산 민족사 : 구약
       
제1장 한 책의 민족 이스라엘
제2장 인간사 서장
    1. 창조된 세계와 인간(아담)
    2. 잘못 출발된 역사
제3장 도상의 나그네
    1. 족장들
    2. 탈출의 족장 : 아브라함
    3. 하느님과 겨룬 사나이一야곱
제4장 엑소더스
    1. 히브리
    2. 모세
    3. 하느님과의 계약
    4. 십계명
제5장 종족공동체의 형성
    1. 가나안 정착
    2. 이스라엘 종족동맹
    3. 판관들
        1) 판관 삼손(판관 13~16장)
        2) 판관 기드온(판관 6~8장)
제6장 왕국시대
    1. 왕권과 국가
    2. 다윗왕조
    3. 왕국시대
        1) 솔로몬 왕
        2) 분단 200년
제7장 예언자
    1. 예언자의 현장
    2. 찬양과 저주一나단
    3. 왕권과의 대결자一엘리야
    4. 종교보다 정의를一아모스
    5. 남은 무리 一이사야
    6. 심판과 새 가능성 一예레미야
    7. 해골의 부활一에제키엘
    8. 너 위한 수난一이름없는 예언자
    9. 예언자의 말의 성격
    10. 과거, 현재, 미래
   
제3부 새로운 개벽 : 신약
   
제1장 예수의 사건
    1. 예수의 시대상
    2. 역사와 해석자
    3. 예수의 선포
        1 ) 하느님 나라의 초대
        2) 낡은 질서와의 대결
    4. 예수의 행태
        1) 무슨 권위로
        2) 예수와 민중
    5. 십자가 처형
    6. 갈릴래아에서 만나자一부활사건
제2장 예수운동의 전진(사도행전)
    1.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민중운동
    2. 이스라엘 민중운동의 목표와 사상
    3. 민중사실
제3장 바울로의 삶과 증언
    1. 그의 삶
        1) 바울로의 위치
        2) 민중사건에 항복한 사울
        3) 바울로의 연대기
    2. 바울로의 증언
        1) 인간세계 심판
        2) 사람됨의 조건
        3) 죽음에서의 탈출
    3. 그리스도와 역사
    4. 자유인의 길
        1) 앞을 향해 달리는 삶(필립 13,1~14)
        2) 하느님 앞에 선 존재 (갈라 4, 1~10)
        3) 이웃과 더불어의 존재
    5. 바울로의 민중론
        1) 고린토교회의 사회계층
        2) 민중을 보는 바울로의 눈
        3) 택함을 받은 민중
    6. 바울로의 수난기
        1)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2) 예루살렘에서
        3) 문제점들
        4) 바울로는 ‘정치범’이 아닌가
        5) 예수의 수난사와 바울로의 수난기
제4장 요한의 증언
    1. 요한복음의 특이성
        1) 공관서와의 관계
        2) 요한의 정신적 풍토
        3) 예수의 새 해석
    2. 개벽의 선언
    3. 갈림길
제5장 박해와 희망(계시록의 신앙)
    1. 묵시문학의 성격
    2. 로마제국과의 대결
    3. 결단할 때
    4. 영원의 노크
    5. 마라나타
한국어로 된 성서 연구 참고문헌
전집간행에 부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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