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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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로마제국과의 대결

by 운영자 posted Sep 0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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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로마제국과의 대결

다니엘서가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 아래서 씌어진 것인데 대해 계시록은 로마제국의 학정 아래서 씌어진 민중의 저항의 글이다.

이 글이 반영된 시대는 이른바 플라비우스(Flavius)시대이다. 그것은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A.D. 69~79년 재위)와 그의 두 아들인 티투스(Titus, A.D. 79~81년 재위) 그리고 도미띠아누스(Domitian, A.D. 81~96년 재위) 3대가 카이사르로서 횡포하던 시기이다. 사람들은 이때를 플라비우스의 삼위일체 체제시대라고 한다.

A.D. 66~70년의 유다전쟁으로 로마제국은 이스라엘을 파멸시켰는데 그 최후를 잔인하게 짓밟은 자가 베스파시아누스이다. A.D. 71년에는 그 땅을 로마의 한 지방으로 편입시키고 이스라엘의 숙적인 '불레셋'이라는 이름을 이 땅에 적용함으로써 '팔레스틴'이 되었고, 유다인을 자기 땅에서 추방하여 세계의 거지떼로 만들었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터 위에는 '주피터' 신전을 세웠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그 신전세를 강요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는 전형적인 독재자로서 네로(Nero) 이래에 허락되었던 그리스인들의 자유마저 박탈하고 그의 위치를 불안하게 하는 어떤 종교나 철학까지도 주저없이 금하고 탄압했던 것이다. 그는 그와 더불어 이른바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선전하면서 점차 자신과 그 가족을 신격화하는 발판을 삼게 된 것이다.

요한계시록이 씌어진 것은 A.D. 95~100년이다. 그러면 티투스 다음의 도미띠아누스시대에 씌어졌다. 그 내용은 바로 이 플라비우스 가(家)시대의 박해시대를 반영한다.

도미띠아누스의 16년간의 통치시대는 그 폭정의 극에 이르렀다. 로마의 정치사적 측면에서 볼 때 그는 유능한 통치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모든 독재자가 그렇듯이 건설의 명수였다. A.D. 80년에 불탄 로마를 재건미화하고, 수도 신전을 재건하였다. 그리고 오늘까지 유명한 로마 광장, 베스파시아누스 신전 건설, 웅대한 자기 궁전 건설 그리고 어느 길로 가나 로마에 도달한다고 할 만큼 유명한 로마와 지방 사이를 연결하는 도로 건설이 그의 시대에 크게 증가, 확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건설을 위한 재정조달을 위해서는 희생자를 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의 판도를 폭력으로 넓혀서 로마는 점령지와 반탈취적 교역을 강요했고, 자기들의 물건을 강매했으며(이 주변 사정이 계시록 18, 11~24에 반영되어 있다), 나아가서는 점령지역의 생산까지 제한함으로써 자기들이 상품의 독점화를 꾀했는데, 계시록에는 동방의 포도 등의 재배에 대한 로마의 강제제한이 반영되어 있다(계시 6, 6).

그는 이미 아우구스투스에게서 시작된 로마 종교의 정비와 수립을 꾀했는데, 그것은 로마의 종교를 그의 통치이념으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자동적으로 카이사르 숭배와 직결됐는데, 그것은 일본이 아시아 정복야욕과 더불어 급조 신도이즘을 만들고 그것을 천황숭배와 직결시킨 것과 비교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계속 앞서간 카이사르 신전전축과 더불어 그것들에 제물 바치는 것을 강화하고, A.D. 86년부터는 마침내 자신을 신이며 주(Deus et Dominus)라고 부르도록 강요했다. 이것에 반항한 사람은 억눌린 자들만이 아니라 원로원, 귀족층에서 많았으며, 많은 헬레니스트들과 철학자들도 항거하다가 잔인하게 숙청처형된 예가 무수하다. 이러한 그의 독재는 각 곳에서의 저항운동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저항에 대해 정면적인 종교탄압을 몰고 왔다.

도미띠아누스는 카이사르와 로마를 거스르는 모든 것을 배격했는 데 그중에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더욱이 우상숭배를 절대 거부하는 전통이 강한 이들에게 박해는 자명하였다. 그는 그러므로 유다교와 더불어 그리스도를 금지했다. 특히 A.D. 93~96년이 극심한 박해시기이다. 첫 클레멘스의 편지에 의하면 A.D. 94년에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모진 박해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베드로나 바울로가 당한 것 같은 집단적 순교가 눈앞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철학자, 천문학자들과 더불어 같은 박해를 받은 것은(유세비우스) 종교의 성격 자체보다 그의 정권 안정에 더 부심한 증거로 보이나, 그렇지만도 않은 것은 그리스도인의 범죄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도미띠아누스는 어떤 민간조직도 금지했는데, 첫째 그리스도교가 교회로 조직된 것은 이 법을 위배하는 것이며, 둘째 그들의 하느님 신앙은 로마제국의 제신(諸神)에게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Plinius). 당시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도미띠아누스의 감정을 분명하게 드러낸 사건은 도미띠아누스의 누이의 딸인 도미틸라(Domitilla)가 그의 남편 클레멘츠와 더불어 처형된 사건인데,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이었다(유세비우스). 이 한 예에서 그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철저한 배격이 잘 드러난다. 이것은 다른 면에서 보면 그리스도교가 이미 카이사르 황실 깊숙이까지 영향을 끼칠 만큼 무섭게 성장했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철저한 경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계시록은 처음부터 박해받는 아시아교회들에게 자신도 저들과 함께 박해받은 것을 전제한다. 그가 한 섬(밧모)에 간 것은 박해를 피해서였다. 베르가모교회가 박해받은 것과 그중에 안디파스(Antipas)라는 신도가 순교한 것을 말하며, 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당한 것도 언급한다(계시 6, 9).

그러나 플라비우스 가의 박해는 바로 계시록의 저자에게 묵시문학적 환상과 언어로 자신의 상황과 현실, 꿈과 신앙을 써나가도록 만들었다. 그는 이 로마제국은 하느님의 심판에 의해 망할 것을 내다보고 있으며, 비록 그들의 폭력에 힘없이 쓰러졌으나 저들은 궁극적 승리자로 다시 살 것이며, 마침내 '천년왕국'이라는 하느님의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을 증거함으로써(계시 20, 1 이하) 저들을 절망에서 구하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하느님에 대한 확신은 그를 역사에 대한 궁극적 낙관주의자이게 한다. 그는 로마를 괴상한 반신적(反神的) 짐승으로 상징하기도(계시 13, 1 이하)하고 짐승을 탄 음란한 창기로 비유하면서, 그의 최후는 이미 하느님에 의해 결정된 것을 전제하면서 이 마당에 그리스도인들, 특히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지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