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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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영원의 노크

by 운영자 posted Sep 0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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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원의 노크

보라,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계시 3, 20).

현재에 안주하기 위해서 결단을 포기하고 있는 자를 찾아 그 소리의 주인공은 현재라는 문밖에 서서 현재를 향해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 문을 두드리는 손은 현재에서 밖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 밖에서 현재를 향해 들어오기 위해 노크하는 손이다. 이 손의 주인공은 '아멘'이요, 신실하고 참된 증인이며, '창조의 근원'이 되는 분이다. 그는 과거에서 온 이가 아니라 미래에서 오고 있는 이다. 과거의 필연으로 형성된 이가 아니라 역사 밖에서 역사를 향해 오는 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현재에 사는 사람에게는 미지의 그 누구이다. 미지의 그가 지금 문을 닫고 안주하려는 기존체제의 문을 두드리면서 어서 열기를 독촉한다. '미래'가 '현재'라는 내 집을 노크한다. 새 가능성을 향해 문을 열라고 노크한다. 그는 "새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네게 들어가 너와 함께 먹고 너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미지의 새 가능성이다.

계시록의 저자는 그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러나 그 그리스도는 과거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제 올 분이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여전히 미지인 누구이다. 그러나 이 노크는 낡은 체제에 의해 세뇌된 사람을 흔들어 깨워 일으키는 부름이다. 그 부름의 소리를 한마디로 하면 "이 세계는 홀로 있는 세계가 아니다"(불트만)라는 것이다. 이 세계의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다른 현실과 마주서 있다. 그런데 사람은 쉽게 이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 마주선 현실은 기존의 것을 뚫고 들어와서 심판 또는 구원의 판가름을 할 것이다.

인간은 이 세계를 이끌어나갈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 세계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며, 사람은 이 세계와 더불어 자기를 내어 바쳐야 하는 주인이 따로 있다. 이 주인에게 내어 바쳐야 하는 날은 바로 이 세계의 종말이며 그것은 동시에 이 역사의 종착점, 역사의 목적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리는 이 세계에 안주하려는 사람에게는 위협이다. 그것은 내 손으로 쌓아올리고 내 손의 때가 묻도록 정을 들였으며, 그것으로 나를 보장한다고 생각된 내 '터전'이 결국 놓아버려야 할 무상한(unheimlich) 것, 나를 내맡길 수 없는 것이라는 경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득권자들은 이러한 소리를 말살해버리기 위해서 자기 집의 문을 더 튼튼히 잠그고 그런 소리에 대해 귀를 막아버리려고 한다. '영원이니 진리니 하느님이니 하는 따위는 다 허구의 소리이다. 그런 것은 나와 상관이 없다. 있는 것은 손에 들어온 것, 들어올 수 있는 것뿐이다'라는 많은 현대인들의 삶의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저들은 동시에 이러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이 세계를 건설해 나가려는 의욕을 소모시키며, 무능한 사람이 되도록 좌절시키는 것이라고 반항한다. 그러나 그러한 무관심주의와 현실주의의 대문을 아무리 굳게 닫아도 이 노크 소리를 말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계속적으로 허무로 돌아가는 잔해들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고 있는 새것에 의해서 무참히도 쓰러져 없어져가는 대열을 통과하고 있다. 어제까지 가치 있던 것이 오늘에는 한푼의 가치도 없는 것이 되어 쓰러진다.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거리에 내버린 시체처럼 되어버린다. 이런 현상은 내 손에 잡힌 도구에서부터 우리 사고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현상을 노출한다. 오늘같이 급변하는 시대에는 가치 있던 것이 허무한 것으로 되어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현상이 더 빨라져 지금에 안주하려는 내 가슴을 두드린다. 우리에게 '이만하면 되었다'고 밀봉해둘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없다. 내가 가진 것은 무엇이나 문을 열라는 노크의 독촉을 받는다. 이 소리에 끝끝내 응하지 않으면 노크의 주인공은 그대로 지나가버린다. 그 때에는 이미 그 밀봉한 것은 시체로 변해버린다.

그뿐이 아니라, 우리에게 '리드미컬'(rhythmical)하게 들리는 노크 소리도 있지만 우리는 또한 계속적으로 오는 불의(不意)의 강타를 당하기도 한다. 천재(天災)에서 받는 강타도 있으나 예측할 수 없는 인재(人災)의 위험이 그것이다. 매일 신문을 들면 안주하려는 내 세계를 위협하는 노크가 아닌 것이 어디 있는가? 이 앞에서 모든 물질은 지나가도 나만은 건재하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제 머리에 나타난 한 올의 백발을 뽑아 손에 들고 죽음의 신이 노크라도 한 것처럼 새삼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 죽음의 사자가 문을 열 때를 계산하고 다시 생활의 설계도를 꾸민다고 한다.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죽음의 사자의 도래는 약속된 시간이 없다. 아니, 이 세상 현재도 내 본향이 아니거니와 나 자신도 나를 내맡길 불공(不攻)의 성벽은 못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이 노크 소리를 말살할 수는 없다. 있다면 취하는 길밖에! 미쳐버리는 길밖에! 그러면서 자기를 상실하는 길밖에!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것은 엄연한 현실 앞에서 우유부단하여 자기를 상실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는 심판의 소리다. 저들은 차지도 덥지도 않은 상태에서 자기를 잃어버리고 있다. 이 소리는 차라리 차거나 더운 것을 원한다. 이 본문은 무엇 보다도 하느님의 물음에 대해서 결단하지 않고 중간에서 애매하게 끌려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물음에 반항 또는 부정하는 자세가 낫 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무신(無神) 또는 반신론자는 아니다. 나는 선하지는 못해도 악하지도 않다." 이러한 최종적인 교두보를 설정하고 이 직접적인 노크 소리를 피해서 자기의 신앙경력, 교회의 일원, 교리에 대한 지식 따위로 성벽을 쌓고 자기는 부(富)한 것으로 자처하고 오히려 남을 문제삼고 비판하여, 이른바 그리스도적인 활동에서 자위하는 자들에게 이 선언은 그 교두보를 철폐한 것과도 같은 심판의 소리이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른바 '그리스도교적'이라는 것으로 이 노크를 정면으로 듣지 않기 위한 완충지대로 만든 사람이 많다. 이들은 차라리 하느님에 대항해서 싸우는 사람보다 못한, 정말 구토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하느님과 싸우는 자는 언제나 하느님과의 연결성을 드러낸다. 가령 니체 같은 이가 그러한 사람이다. 그가 하느님은 죽었다고 선언해야 했음은 그만큼 하느님의 존재 자체가 그에게 심각한 문제였음을 말한다. 그것은 분명히 이 노크 소리를 정면으로 듣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의 이 반항의 소리는 한걸음 나아가서 신에 대한 물음에서 결단을 보류하고 기독교적인 것으로 둘러싸여 안주하는 자들에게 강한 노크가 되었다.

한때 서구의 신학자들 중에서 이른바 '신의 죽음의 신학'이라는 아이러니컬(ironical)한 소리를 질러야 했던 것도 어떻게 보면 인간의 교만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적인 것으로서, 부한 줄 알았던 인간이 자체 내의 허무감(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자기)을 그대로 폭로 하는 겸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신의 죽음의 신학'의 소리도 실은 애매한 상태에 안주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노크가 아닐 수 없다. "하느님께 행한 집요한 싸움은 오히려 하느님께 가까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의 소리를 듣는 귀를 가진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노크 소리는 이른바 종교인에게만 심판이 되는 것이 아니다. 로마제국으로 상징되는 전세계, 정복, 강탈한 부(富)에 취하여 교만한 자가 지배하는 이 세계의 심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밑에서 종교 대신 삶의 의미니 진리니 가치니 하는 것을 설정하고 안심하는 인간 전체에 해당된다. 낭만주의는 어느 시대에 일어났다가 사라진 유물이 아니다. 이것은 언제나 인간에게 붙어 돈다. 그것은 '나는 짐승이 아니다'라는 증거를 위해서도 필요하며, 나 밖에 타의라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이 영원의 노크 소리를 둔화시킨 관념들이다.

만일 이 노크한 손이 그 문을 열면 어떤 사실이 폭로될까? 내가 산다고 자처하던 바로 그 안이 텅 빈 공간뿐이고, 나는 그 밖에서 떨고 있지 않을까? 그 안에 내 이력서, 기쁨, 슬픔, 걱정, 의복, 훈장, 돈 따위는 있어도 그것들의 주인이 되어야 할 '나'는 없는 진상이 폭로된다면? 할 일이 있을 때, 지위가 주어졌을 때 그처럼 활기있던 사람이 그런 것에서 제거되는 순간 그대로 이지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과 일 사이의 공간을 메울 길이 없어 몸부림치는 현대인은 무엇을 말하는가? 부요한 나라에서 여가(餘暇)가 그처럼 사회문제로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노크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너로서 존재하고 있느냐고! 너는 만화가 빌헬름 부쉬가 상상한 수학적 인간이 되어 있지 않느냐고! 행동은 정확하나 그 속은 동굴이었다는 그 수학 인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