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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1:09

내가 만난 안병무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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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명수

(경성대학교 교수)


1.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의 삶


96년 10월 안병무 선생의 소천(召天) 소식을 듣고 나는 한국 신학계의 큰 별이 사라지는 것 같은 허탈감에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안병무 선생이 아니었으면, 결코 오늘의 내가 있지 아니 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 선생님은 때로는 스승으로,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형님으로 지금까지 내 곁에 계셔서 내 삶의 등불이 되어 주셨다. 내 연구실에는 한동안 안 선생님의 사진을 비치하고 있었는데, 그 사진을 보면서 어느 동료 교수가 나에게 한 말이 있다. “김 박사보다 안병무 선생을 존경하는 제자는 없을 것이다.” 안 선생으로부터 자주 들은 좌우명이 생각난다.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가 그것이다. 공을 이루면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한 구절인데, 안병무 선생은 평생 이 말씀을 등불삼아 사신, 보기드문 예언자이시다. 공을 이루고도 그 자리에 머물지 않음으로써, 오직 머물지 않음으로써(夫惟弗居) 안 선생은 그분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 마음 속에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분이다(是以不去). 안 선생은 마치 내 곁에 머물다 떠나간 천사 같은 분으로 생각된다.
내가 안병무 선생을 마지막 찾아 뵌 것은 돌아가시기 두어 달 전이었다. 서울에 있을 때에는 자주 전화도 드리고 찾아 뵙기도 하였는데, 91년 봄학기부터 부산신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다 보니 그러지 못하였다. 그러나 방학 때는 꼭 거르지 않고 한 번씩 찾아뵙겠다고 나 자신에게 약속하였고, 돌아가실 때까지 그 약속은 지킨 셈이다. 인도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 제자의 초청으로 96년 8월 초에 제자들 몇 명과 인도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인도로 떠나기 2-3일 전에 선생님을 찾아 뵈려고 전화를 드렸다. 내가 찾아가면 그렇게 좋아하셨고, 다른 약속도, 어느 때는 병원 약속까지 취소하시고 서너 시간씩 이야기를 나누셨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오후에 우면동 선생님 자택을 찾았다. 얼굴이 부석부석한 것이 지난 2월에 찾아 뵈었을 때보다는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아 마음이 아팠다.
찾아 뵈면 나의 근황에 대해서 자세하게 물어보시고, 내 걱정을 많이 하셨다. 가까이 있어서 나를 도와 주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누차 말씀하시곤 하였는데, 여건이 그렇지 못하니 나도 안타까울 뿐이었다. 때로는 한신대 교수들이 나에 대하여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제 조금씩 풀리는 것 같기도 하다는 귀띔을 해 주시기도 하였다. 나는 글을 쓸 때마다 늘 선생님께 보내드리곤 하였는데, 찾아 뵈면 먼저 나의 글을 코멘트해 주시고 불분명한 것은 지적도 해 주셨다. 특히 선생님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셨는데, 서구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경향성에 대하여 많은 것을 묻기도 하셨다. 그리고나서 선생님께서 최근 생각하시는 민중신학적 단상(斷想)들을 말씀하시고 나의 견해를 묻는 일도 잊지 않으셨다. 처음에는 선생님께서 말씀을 많이 하시고 나는 듣는 편이었는데, 나중에는 나에게 많은 것을 물으셨고, 내 말에 귀를 기울이셨다.
그날도 큰 창문 너머로 뒷산 나무와 숲이 보이는 선생님 방의 조그만 의자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 과정에서 나는 최근 선생께서 민중을 보다 넓은 생명의 지평에서 새롭게 이해하시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는데, 민중을 단순히 언어의 세계와 사회적 범주로 이해하는 편협성을 벗어나서 말 없는 자연 속에서 민중의 소리를 듣고, 민중의 모습을 발견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타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인 자세를 취하는 보수주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으셨다. 선생께서 태어난 고향인 신안주와 청소년 시절을 지낸 북간도를 한번 방문하고 싶다는 말씀도 하셨다. 이야기를 마치고 현관까지 나오셔서 배웅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게 선생님을 마지막 뵌 순간이 될 줄은 누가 알았으랴.


2. 한신대학교 시절


필자가 안병무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72년 2월 한국신학대학교 학사편입학 시험장에서였다. 필자는 당시 일반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4년 동안 생명을 느낄 수 없는 학문을 해오면서 많은 회의를 가지게 되었고, 인간을 직접 다루는 학문을 모색하던 중 신학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면접 장소에는 김정준 학장을 비롯하여 여러 교수님들이 둘러앉아 계셨고, 질문은 주로 당시 교무과장이었던 안병무 교수께서 하셨다. 신학을 택하게 된 동기와 개인 신상에 관한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는데, 특히 인상적인 것은 장차 진로에 대한 질문이었다.
장차 목회와 학문의 길 중 어느 길을 택하겠느냐는 질문에 목회자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하자, 교회에서 목회를 하더라도 학문적 바탕이 튼튼해야 하니 학문에 게을리 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권면해 주셨다. 이 권면이 필자에게는 큰 자극이 되었고, 학문의 길을 걷게된 동인(動因)이 되었다.
안병무 선생의 공관복음서 신학과 불트만 신학 강의는 특히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필자에게도 인상적이었다. 그의 강의 방법은 독특한 데가 있었는데, 강의를 주로 의자에 앉아서 하는 편이었고, 말은 천천히 하였다. 강의하다가 갑자기 말을 끊고 창문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학생들의 주의를 집중시킨 다음, 중요한 대목을 힘주어 말하곤 하였다. 학문의 엄격성, 비판적 사고의 철저성, 절제된 실존주의적 수사학에 근거한 언어 표현 양식의 독특성은 학생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는 학생들이 꼭 기억해두어야 할 개념은 반드시 독일어를 칠판에 써놓고 설명해 주셨는데, 지금도 필자에게 잊혀지지 않는 개념으로는 ‘실존’(Existenz), ‘실존적’(exitenzielle), ‘실존론적’(existenzialle), ‘현존’(Dasein), ‘죽음에로의 존재’(Sein zum Tode), ‘세계 안의 존재’(Sein-in-der-Welt) ‘주객도식’(Subjekt-Objekt-Schema) 등이다. 불트만의 제자였던 안 선생은 그 당시 주로 키에르케고르와 하이데거 철학의 실존철학적 개념을 원용하여 불트만 신학을 소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독일신학 강의는 미국신학 일색이던 당시 한국신학계의 풍토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70년대 초반 그의 실존주의 신학 강의는 독재정권 하에서 그 어떠한 탈출구도 발견하지 못하고 좌절에 빠져 있던 한국의 그리스도교 지식인들에게 청량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수유리 한신대학 교정에는 아담한 잔디밭이 있는데, 교수와 학생들에게 큰 쉼터 역할을 한다. 잔디를 사랑하는 마음은 안 선생에게 각별하였다. 수업이 없는 시간이 있으면 잔디밭에서 잡풀을 뽑아 주는 안 선생의 모습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는데, 선생께서 잔디밭에서 풀을 뽑고 있으면 학생들이 그 옆에서 모여들어 함께 잡풀을 뽑아 준다. 그러면 잔디밭은 자연스럽게 강의실로 변한다. 풀를 뽑으면서 안 선생은 학생들에게 독일 유학 생활의 경험과 그동안 살아오신 삶의 역정(歷程)들을 말씀해 주시곤 하였는데, 강의시간에 들을 수 없는 선생님의 주변에 관한 이러 저러한 이야기들을 들려 주셨다. 나도 독일 유학에 대한 꿈을 그 당시에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군사독재는 유신헌법을 만드는 등 영구집권을 획책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대학생들의 학생운동도 치열하였다.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한신대학의 학생운동도 서울의 여느 대학 못지 않게 치열하였는데, 당시 안병무 선생과 문동환 선생은 한신대학 학생운동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였다. 당시 필자는 한신대 대학원에 원우회장으로 있으면서 안 선생의 조교로 일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선생님과 평생 인연을 맺게 되는 동기가 될 줄은 몰랐다. 안 선생은 나에게 한신대 학생운동에 대하여 시간이 있을 때마다 물으셨고, 전반적으로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유비(유언비어)통신에 의거하여 자주 말씀해 주셨다.
세미나 시간에 안 선생의 신학적 경향성은 점차 변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불트만의 신학을 비롯하여 서구 신학의 한계성을 자주 언급하였다. 서구의 학문(Wissenschaft)와 동양의 학(學)의 차이점을 지적하면서 신학은 비센샤프트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서구 신학의 아카데미즘은 학문의 자유라는 명목을 내세워 교회와 현실로부터 장벽을 쌓고, 그것과 무관한 학문의 세계를 건설하여 그 안에 안주(安住)한다는 것이다. 신학이 일상적인 경험과 실천을 배제하고 추상적인 사유와 언어의 영역에서 진리를 독점하고 있을 때, 신학은 현실로부터 유리되고 지배계급에 종사하는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서구의 ‘학문’ 세계에서는 선생과 학생 사이에 단지 지식을 매개로 한 관계만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비판하면서 그는 동양에서 말하는 ‘학’(學)에 관심을 기울였다. 동양에서의 학이란 학자의 삶과 학문 사이에 간격이 없고, 스승과 제자 사이도 단순히 지식을 통한 매개가 아니라,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운명공동체적 관계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는 성서 본문 하나하나를 쪼개고 분석하는 역사비평학을 가르쳤지만, 한편으로 그와 아울러 성서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통째로’ 읽어야 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안 선생의 대학원 세미나는 엄격하기로 유명하여 수강을 신청하는 학생들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자동 폐강 위기에 처한 적도 여러 번 있었는데, 그 때마다 나는 학생 끌어모으기에 진땀을 흘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미나 한 학기를 마치고 나면, 다른 어느 교수의 세미나보다 보람도 있었다. 선생님은 학기가 끝나면 매학기 말에 세미나 수강생들을 수유리 자택에 초대하여 저녁식사를 같이 하곤 하셨는데, 박영숙 사모님의 음식 솜씨는 훌륭하였다. 선생님은 주로 10여 년의 독일 유학시절에 경험했던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 주셨는데, 그것은 후에 유학생활에 도움이 되었다.
75년 봄이었던가?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박정희 군사정권은 긴급조치령에도 불구하고 이에 항거하는 학생운동이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자, 고려대학과 한신대학에 무기한 휴교령을 내렸고, 학생들은 기숙사에도 들어갈 수 없어 한밤중에 경찰관의 눈을 피하여 담을 넘어 들어가 불도 못켜고 울분을 삭이던 적도 있다. 명동성당 위장 결혼식 사건(같은 해 4월로 기억된다)으로 윤보선 전 대통령과 함석헌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이 끌려갔는데, 안 선생은 심장경색증이 악화되어 간신히 화를 면하셨다.
이 때 문교부는 학생운동의 정신적 지도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된 교수들을 해직시켰는데, 연세대의 김찬국 교수, 고려대의 이문영 교수를 비롯하여 한신대학에서는 안병무 선생과 문동환 선생이 해당되었다. 후에 해직 교수 가족들을 주축으로 목요기도회와 갈릴리 교회가 결성되어 70년대 기독교 반독재 항쟁과 민주화 인권 운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두 분 교수님의 해직으로 인한 한신대 학생들의 착잡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두 분 해직 교수님들을 위로해 드리기로 당시 대학원생 몇 명이 계획을 세웠다. 지금 기장 여신도에서 일하고 있는 정보영 목사, 한국염 목사, 부천에서 시민운동을 하고 있는 나의 친구 이창식,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시인 고정희, 그리고 몇 명이 더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침 일찍 청량리 역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차표를 준비하고 완행열차를 기다리는데, 안 선생께서 헐렁한 옷 차림에다가 밀짚모자를 푹 눌러 쓰시고 나타났는데, 꼭 시골 장돌뱅이 비슷하여 우리가 배꼽을 잡고 웃었던 기억이 새롭다. 완행열차는 시골 사람들로 꽉 찼다. 나는 날렵한 행동을 개시하여 간신히 두 분 선생님 자리를 마련해드리고 우리는 신문지를 깔고 바닥에 앉아서 갔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이름 모를 시골 역에 내렸다. 한가한 오솔길 양 옆에 미루나무가 나란히 서서 반가이 맞아 주었다.
우리는 이 얘기 저 얘기하며 걸어 내려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야트막한 야산으로 올라갔다. 아마도 남이섬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우리는 올라가면서 “타박네야” 노래도 부르고, 웃기도 하고, 욕도 하였다. 선생님들도 체면을 내팽개치시고 그동안 쌓인 울분을 터뜨리시며 우리와 똑같이 행동하셨다. 학교 강의실에서 그리고 강연 때에 볼 수 없는 선생님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산 중턱까지 올라가 중간에 자리잡기로 하였다. 계곡에 발을 담그고 밥도 하고 찌개도 끓이고 곡차도 좀 들었던 것 같다. 하여튼 시국 돌아가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두 분 선생님의 기분이 어느 정도 좋아지자 강변을 향하여 마음껏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대기도 하였다. 만일 서울 시내에서 그런 욕을 하였으면 긴급조치법, 막걸리 반공법에 걸려 징역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동안의 긴장과 스트레스,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서 그런지 저녁이 되자 선생님은 몸을 가누지 못하셨다. 간신히 청량리역에 내려 택시로 수유리 댁까지 모셔다 드리고 나는 기숙사로 돌아왔다.


3. 신학연구소 시절


1975년 가을 어느날 ‘소위’ 학원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전병생, 나도현 목사와 함께 서울 구치소에 갇혀 있을 때이다. 이듬해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가톨릭과 개신교에 속한 재야인사들이 연합하여 민주화 구국선언서를 발표하게 되었는데, 이 사건에 연루되어 가톨릭 측에서는 김대중 선생을 비롯하여 문정현, 함세웅, 신현봉 신부 등이 그리고 개신교 측에서는 문익환, 문동환 형제 목사를 비롯하여 서남동, 이해동 목사 등이 투옥되었다. 안병무 선생도 이 사건으로 서울 구치소에 투옥되었고, 3년 형을 구형받았다.
그 당시 내 바로 옆 방에는 문정현 신부가 계셨는데, 그분을 통해서 안 선생, 문 목사님의 근황과 재판 진행 과정에 대해서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출정(出廷)을 가던 길에 우연히 안 선생께서 계시던 사방(舍房)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교도관의 눈을 피하여 선생님 방까지 갔다가 혼이 난 적이 있다. 그후 얼마 안 있어 2심 재판이 끝나자, 안 선생은 건강의 악화로 인하여 집행유예로 풀려나셨고, 나는 10년 형이 확정되어 대전교도소로 이송되었다.
대전교도소 시베리아 사방에서의 생활은 혹독하였다. 0.78평 짜리 독방에서 잠자리에 누울 때를 제외하고, 나는 매일 거의 가부좌 자세로 앉아 책을 읽거거나 명상요가로 지내야만 하였다. 하루 운동 시간이 30분인데, 이 시간도 교도관의 감시 하에서 어느 누구와도 말할 수가 없었다. 어느 여름 더운 날 나는 부패한 음식을 먹어서인지 참을 수 없는 복통으로 고생한 적이 있다. 급성 충수염으로 인해서 밖에 나가 수술을 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으시고 안 선생께서 영치금과 영치물을 보내 주셨다. 영치물 가운데는 일본신학자 야기 세이찌의 책을 비롯하여 몇 권의 독일어로 된 신학책이 들어 있었다. 사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안 선생이 보시던 책 들임을 알 수 있었다. 윤보선, 김대중 선생의 이름으로 영치금도 들어와 있었다. 그 뒤로 안 선생은 내가 출소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신학서적을 보내 주셨다.
79년 10월 박정희 암살사건으로 나는 4년 6개월의 감옥생활을 청산하고 출소하게 되었고, 한국신학대학원에 복학하였다. 학위논문 문제로 선생님을 찾아가자,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수난 이야기를 오늘 한국 민중의 고난의 시각에서 정리해보라는 권면을 하셨고, “마가 수난사”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였다. 막상 졸업하자 갈 데가 없었다. 목회 자리를 몇군데 알아보았으나, 빵잽이라는 이유로 번번히 퇴짜를 맞고 말았다. 김정준 교수께서 특히 관심을 써주셨는데 모두 허사였다. 80년도 11월로 기억되는데, 한국신학연구소 간사로 오랫동안 수고하던 학형 신흥섭 목사가 독일 유학길에 올랐을 때 김포공항에 환송하러 나간 적이 있다. 그 자리에 안 선생도 와 계셨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는가 근황을 물으셔서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며칠 후 연구소에서 연락이 왔다. 그래서 나는 손규태(현 성공회대학교 교수), 임태수(현 호서대학교), 신흥섭 목사에 이어 한국신학연구소 4대 간사로 부임하여 『신학사상』 출간을 비롯하여 연구소 전반적인 일을 책임지고 선생님을 도와 드리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언론을 장악하기 위하여 언론기본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모든 언론기관들을 물리적인 힘으로 통폐합시켰을 뿐만 아니라, 빵잽이들이 언론기관에 일할 수 없도록 이를 법으로 금지시켰다. 한국신학연구소도 계간지 『신학사상』을 발간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론기관으로 분류되어 있었고, 나는 언론기본법에 묶이어 『신학사상』 편집자로 일할 수 없었다. 내 문제로 몇 차례 이사회가 열렸다. 결국 소장인 안 선생께서 나에 대한 법적인 문제를 책임지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를 채용하였다.
안암동 네 거리에 위치한 연구소 시절은 비록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의미있고 보람있는 기간이었다. 매주 월요일마다 독일 선교사 도로테아 슈바이처(Dorothea Schweizer) 선생을 포함하여 온 직원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다. 창세기부터 매번 1장씩 돌아가면서 읽고, 선생님께서 해석을 곁들인 설교 아닌 설교를 하셨는데, 이 시간을 통하여 성서를 보는 새로운 통찰력을 얻게 되었다.
선생님은 매달 한 차례씩 민중신학자들과 현장 활동가들 10여 명이 연구소에 모여 정기 발표회를 갖도록 주선하였는데, 이러한 모임이 기틀이 되어 민중신학이 체계를 이루고, 지속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다. 대만의 신학자 송천성(C. S. Song) 박사와 독일의 몰트만 교수도 이 모임에 참석하여 민중신학자들과 자리를 같이한 적도 여러번 있다. 민중신학을 세계 신학계에 소개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책 『민중과 한국신학』에 게재된 글들은 모두 이 모임에서 발표되고 토론을 거쳤던 논문들이다.
선생님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자선을 베푸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신대 후배들을 비롯하여 선생님과 개인적인 인연을 맺고 있던 학생들이 출소하여 찾아오면 선생님은 절대로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적이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나를 통하여 그들에게 성의를 표시하곤 하셨다. 한 번은 감방 후배가 찾아와 청계천에 봉제공장 하나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자금이 모자란다고 하소연하였다. 큰 액수는 아니었지만, 나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선생님에게 말씀드렸더니 선뜻 그 돈을 빌려 주셨다. 나는 한신대학 출신 빵잽이 가운데 직장생활을 하는 몇 안되는 행운아이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많은 후배들이 항상 연구소를 드나들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연구소 일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생님은 전혀 그런 일에 개의치 않으셨다.
연구소 직원들의 단합을 위하여 한 달에 한 번 정도 회식을 하고, 한 학기 한 번 정도 소풍을 간 것으로 기억되는데,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선생님은 꼭 참석하셨다.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하기 위하여 선생님은 손바닥만한 수첩을 꺼내어 그곳에 깨알같은 작은 글씨로 적은 해학(諧謔)이나 유행가 가사를 들려 주시곤 하셨다.
선생님은 학술강연 차 독일 여행을 자주 하셨는데, 원고를 준비하면 반드시 직원들 앞에서 한번 리허설을 하시고 우리의 반응과 느낌을 물으신 다음 원고를 최종 마무리하셨다. 독일 교회는 그 당시 발표된 글들을 모아 몇 권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선생님은 바쁜 일정에도 귀국할 때에는 연구소 직원들에게 조그만 선물을 준비하는 것을 잊지 않는 세심함을 보여 주시기도 하셨다.


4. 독일 유학 시절


4년 동안의 신학연구소 생활은 나에게 많은 의미를 주었고, 내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시기였다. 여러 가지 학문적 넓이와 깊이를 더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안 선생님을 가까이 모시는 행운의 기회이기도 하였다. 많은 민주인사들과 재야인사들을 만나는 계기도 되었다.
어느날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셔서, 독일 유학을 권하셨다. 케리그마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민중신학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는 원시 그리스도교 예수운동에 대한 사회사적 연구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이었다. 서구 신학과 대결하고 민중신학의 학문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한다는 것이 선생님의 뜻이었다. 그래서 손규태, 임태수, 신흥섭 목사를 먼저 유학시켰고, 연구소 직원으로 일했던 황현숙(협성대), 황정욱(한신대), 김흥수(목원대), 이선희(목원대), 윤선아, 김판임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박재순과 박경미(이화여대)는 국내에서 학위를 하였다.
나는 사회학적 방법론을 동원하여 성서를 해석하는 타이센(G. Theissen), 쇼트로프(L. Schotroff), 슈테게만(W. Stegemann) 등의 신학논문들을 부분적으로 『신학사상』에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하면서 유학 준비를 하였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이 보였다. 때마침 쇼트로프 교수 밑에서 학위를 마치고 귀국을 서두르던 김창락 박사(한신대)의 도움으로 쇼트로프 교수와 연결되었고, 그분 밑에서 논문을 쓰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소정의 심사를 거쳐 WCC 장학생으로 선발되었고, 출국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하였다. 나의 전력(前歷)(?) 때문에 안전기획부에서 신원조회가 떨어지지 않았다. 청와대, 안기부장, 법무부장관, 문교부장관 등 해당기관에게 탄원서를 제출해 보았으나 모두 허사였다. 모든 창문이 닫혀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또 하나의 창문을 열어놓고 계시다는 것을 나는 이 때 체험하였다. 나의 안타까운 사정을 옆에서 보고 있던 독일인 선교사 도로테아 슈바이처 선생이 어떤 형식으로든지 나를 돕고 싶다고 말하면서 영문 이력서 한 통을 작성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 달쯤 지났을까? 안기부 직원으로부터 만나자는 기별이 왔다. 내 신원을 보증할 수 있는 교계 어르신 두 분의 신원보증을 받고, 내일부터 출국수속을 밟으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독일 외무부 장관이 한국 외무부 장관에게 외교적인 채널을 통해서 나의 유학을 정식으로 요청했고, 안기부는 독일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나의 유학을 정치외교적인 차원에서 마지못하여 허락하였던 것이다. 안 선생께서 슈바이처 선생의 도움으로 독일 루터교 주교 회장인 비숍 로오제(E. Lohse)에게 편지를 했고, 그분이 친구인 외무부 장관에게 부탁하여 나의 유학을 독일 교회와 정부가 책임진다는 조건으로 한국 정부 측에 요청했던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독일 교회 함부르그(Hamburg) 지역노회의 장학금을 받게 되어 함부르크대학 개신교신학부에 등록하고 쇼트로프 교수에게로 옮길 예정이었다. 독일에 도착했음을 쇼트로프 교수에게 알렸더니 그로부터 장문의 편지가 왔다. 요지는 마부르그(Marburg)대학 신학부의 보수화 경향으로 자기 위치가 불안정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할 형편이니 함부르크대학에서 학위 과정(Promotion)을 하라는 권면이었다. 그러면서 그의 동료인 파울젠(H. Paulsen) 교수를 소개해 주었다. 나는 함부르크대학에 머물게 되었고, 소정의 과정을 이수한 후 “원시 그리스도교 예수 어록 공동체에 대한 사회사적 연구”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쓰기 시작하였다. 논문의 전체적인 윤곽을 잡는 일부터 편지를 드릴 때마다 안 선생은 답장을 주셨고, 여러 가지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1년에 한 차례 정도 독일에 오셨는데, 그때마다 만나 뵐 수 있었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도 함부르크에서 선생님이 계신 곳까지 왕복 차비는 선생님께서 지불하셨다.
일차적으로 논문을 완성하여 제출하였으나 부심을 맡았던 에카 라우(E. Rau) 교수가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는 보수적인 성향을 지니면서도 소위 서구적인 학문의 방법론을 중시하였다. 라우 교수는 오늘의 억압의 현실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 민중신학을 포함한 제3세계신학의 방법론에 대하여 달갑지 않게 생각하였다. 도대체 예수어록에 ‘민중’이란 개념이 중심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데, 예수어록을 담지했던 공동체를 어떻게 민중공동체로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 그의 문제 제기였다. 그는 언어적 개념에 절대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나의 입장은 달랐다. 개념이나 언어가 공동체의 성격을 규정하는 하나의 요인은 될 수 있지만, 지배적인 요인은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었다. 비록 민중이란 개념이 예수어록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오히려 어록공동체가 전승하는 예수 말씀의 성향, 그리고 하나님 나라 선교적 실천의 내용과 민중 지향성이 공동체의 성격을 결정하는 주도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었다. 이 시각에서 귀납적 방법을 동원하여 예수어록 공동체의 민중적 성향을 추적하는 것이 나의 과제였다. 민중신학적 방법론을 도입한 성서해석의 학문적 타당성에 관하여 나와 라우 교수 사이에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고, 주심인 파울젠 교수는 나의 입장을 지지하면서도, 곤란해 하였다.
때 마침 안 선생께서 베를린선교센터(Berliner Missions Werk)의 초청으로 독일 체재 중이었다. 함부르크대학에 재직하면서 동시에 선교아카데미 소장을 겸임한 테오도르 아렌스(Th. Ahrens) 교수 또한 내 논문의 부심이었는데, 그는 민중신학에 많은 관심을 가진 보기드문 분이었다. 아렌스 교수의 주선으로 안 선생을 함부르크 선교아카데미로 초청하고 동시에 라우 교수를 비롯하여 함부르크대학 신학부 교수들과 신학자들이 초청되었다. 안 선생께서 민중신학에 관해서 발제를 하고, 이어서 몇 시간에 걸쳐 진지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이 세미나를 통하여 라우 교수는 민중신학에 관해서 어느 정도 인식을 할 수 있었고, 나의 신학적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그와 타협점을 마련하여 논문을 마칠 수 있었다. 안 선생과 아렌스 교수 두 분이 아니었더면 아마 나는 몇 학기를 더 고생하였을 것이다.
논문을 제출한 후 구두시험을 앞두고 선생님께 앞으로 진로에 대해서 편지를 드렸다. 번역으로 빌어먹을 요량을 하고 오라는 답장이었다. 한신대를 비롯하여 몇 군데 알아보셨으나 사정이 여의치 아니했던 것 같다.


5. 사상가 안병무


안 선생은 신학자이기에 앞서 사상가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정교한 신학이론을 동원하여 논리정연한 신학작업을 하기보다는 민중이 당하는 고난의 현실을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증언하는 데 전 생애를 투신하였다. 원시 그리스도교 마가교회 공동체가 기적에서가 아니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며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죽어간 예수에게서 ‘초월’을 만나라고 외쳤다면, 안 선생은 오늘 민중이 당하는 수난의 현장에서 현존의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초월을 해후할 수 있는 장소는 교회, 신비, 황홀경,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도 아니다. 민중사건과 민중 역사야말로 초월을 만날 수 있는 결정적인 장소(Topos)임을 그는 증언하였다.
안 선생은 기존 질서에 안주하거나 한 가지 사상에 매이기를 거부하였다. 언젠가 그는 인생을 수영과 비유한 적이 있다. 수영자는 손을 뻗어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가라앉고 만다. 안 선생은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았다. 그는 부단히 현실에서 탈출하는 삶, 곧 한 곳에 머물지 않고 “脫向的 삶”(Aus-Auf-Leben)을 살다 가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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