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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1:02

그리스도인의 바일슈타인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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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삼열

(숭실대 기독교 사회연구소장)


1


내가 안병무 박사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생 때였다. 1960년대 초 서울 문리대 기독학생운동(SCM)의 모임에서 어느 날 강사로 오신 안 박사님을 처음 뵌 인상은 신학자라기보다는 시인이나 철학자 같은 모습이었다. 독일에서 학위를 마치고 갓 돌아오신 40대 초의 선생님은 화가들이 쓰는 검은색 베레모를 쓰시고 모교의 교실에서, 후배 기독학생들에게 불트만의 신학을 열심히 말씀하시었는데 당시 철학도였던 나의 귀에는 하이데거의 이야기만 들렸다. 이 분이 리버럴한 사상을 가진 신학자였다는 정도만 알았지 그의 인품이나 배경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67년, 68년경에 크리스찬아카데미 간사로 일하면서 가끔 대화모임(Tagung)에서 뵈었지만 그의 사상은 좀 난해했으며, 독일철학의 영향이 강해서인지, 꽤나 추상적이고 사변적이라는 인상이 들었다. 4·19 학생혁명 이후 사회적 실천이나 개혁운동 같은 현실 문제에 관심이 깊었던 나에게는 실존철학에 깊이 물이든 안병무 박사나 허혁 박사의 사변적 고뇌가 관심은 있었으나 그렇게 현실적으로 어필해 오지는 못했다. 그가 40이 넘도록 총각으로 수절한 경건주의자였고, 일제시대 간도에서 미션스쿨을 다닌 민족주의자 청년운동가요, 신앙적 고민을 가지고 서울 문리대에서 사회학 공부를 했고, 함석헌 선생의 영향을 받아 평신도교회를 처음으로 창립한 교회운동가 그리고 신학을 전공하였지만, 목사 안수를 끝내 받지 않고 평신도로 머문 고집스런 신학자였다는 배경을 그때 알았다면 나의 신앙적 사상적 문제의 고민을 털어놓고 의논할 좋은 선배였을 텐데 나는 유감스럽게 그렇게 만날 기회를 한국에서는 갖지 못했다.
68년에 에큐메니칼 장학금을 받아 독일로 유학을 가서야, 나는 독일에 나보다 10여년 앞서서 유학을 하신 안 박사님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몇 년 뒤인 72년경부터 신앙과 정치참여의 문제로 국내와 해외의 크리스천들이 고민하며 반독재운동에 나서게 되었을 때 안병무 박사님은 독일을 방문하시어 독일에서 유학하며 일하던 크리스천 지성인들이 민주화 운동에 나서게끔 영향을 주시고, 독일교회가 한국 교회의 민주화 인권운동을 지원케 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시게 되었다. 자연히 나는 72년부터 82년에 귀국하기까지 10년동안 한독교회의 협력관계나,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국내와 국외의 크리스챤들의 연대활동에 참여하게 되어 안 박사님을 가까이서 뵙고 짧지만 깊이 사귀며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안병무 박사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과 영향을 주시는 존경할 만한 스승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나에게도 겨우 70년대부터의 만남과 사귐이었지만, 안병무 선생님은 그냥 존경하고 사숙하는 선배요 스승일 뿐 아니라 한 매력적인 인간이요, 신뢰하는 동지요, 재미있는 친구와 같은 인물로서 마음 속에 지워지지 않는 영상으로 각인되어있는 분이다. 내가 만나고 알게 된 안병무 박사님은 50년대 후반에서부터 말년까지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완숙해지신 때이고, 특히 반독재 민주화를 신앙적 역사적 사명으로 생각하시고 헌신적으로 실천하며 투쟁하시던 시기였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냥 존경하는 인물 정도가 아니라 배우고 따르고 모방하고자 하는 스승이요 표본과 같은 모델이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좋게만 보고 남보다 점수를 더 주는 편견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주화운동에 나선 여러 어른들이나 지도자들 가운데도 특별히 안병무 박사님과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그분과 나의 여러 가지 관심의 공통점과 여러 가지로 같은 길에 선후배에 대한 그분의 친근성과 아량 때문인지 모른다.
무엇보다 안병무 박사님의 삶과 행로에서 내가 공감하며 동일시하는 점은 신학과 철학(혹은 사회학)의 만남을 일생 추구했다는 것과 신앙과 삶의 모순없는 일치와 조화를 위해 고민하면서 기존의 교리나 제도에 대해 과감히 저항해왔다는 점이다. 독일유학을 하며 독일적 철학과 신학사상을 탐구하면서 역사적 실천을 모색한 선배로서의 의미도 크다. 나는 그분의 어린 시절이나 청년 학생시절의 고민을 잘 모르지만 간간히 들려주시는 대로 그분의 삶은 기존의 것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저항이었고, 진리와 이상적인 것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열정적 추구였던 것으로 느껴졌다. 이런 태도와 정신에서 그는 남 안하는 짓을 많이 하신 분이다. 보통 사람들은 감히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을 그분은 소신이 생기면 콱 저질러 버리는 용단이 있는 분이었다. 내가 독일 유학을 하고 철학을 했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50년대 말 60년대 초에 남들이 생각 못하는 독일 유학을 개척해 간 사람들은 대부분 별난 사람들이었고, 역사적 현실에 대한 강한 부정과 다른 세상에 대한 강한 집념이 있는 분들이었다. 안 박사님은 서울 문리대 사회학과에 다니실 때도 상당한 반골 기질이 있는 고명한 교수들을 사숙한 것이 아니라 함석헌 선생님 같은 들사람 얼을 좋아하시고 따르신 것 같다.
더구나 나에게 매력적이고 감동적인 것은 이미 대학 시절에 장하구, 홍창의 등 독실하며 개혁적인 동학들과 함께 기성교회에 대한 대안적 모델의 개척을 위해 목사 없는 평신도 교회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지금 향린교회가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알고 있다. 나는 안 박사님을 모방하려는 의도에서는 아니었지만, 그리고 향린교회는 이미 목사님을 모신 교회가 되고 말았지만, 87년에 한완상, 김창락, 길희성 등과 함께 새길교회라는 평신도가 말씀 증거를 하는 교회를 개척해 보았다. 목사 중심의 기성교회에 익숙한 교인들과 함께 평신도교회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나는 이 때 철저히 경험하였다. 어지간히 고집스럽고 집요한 괴짜가 아니면 시작도 해보기 어려운 것이 평신도가 목회하는 교회이다.
안 박사님은 괴짜의 풍모를 많이 갖고 계신 분이다. 어렸을 때는 상당히 장난꾸러기였을 것 같다. 거기에 매우 보수적이고 엄격한 경건주의 신앙교육이 그의 인격의 뼈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부단히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기존의 풍습에 저항하는 유토피아적 꿈과 모험심이 많은 청년이었다. 그가 왜 50에 가깝도록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을 지켰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무책임한 결혼과 방종을 모두 거부한 기존의 풍습에 저항하는 삶을 고집스럽게 실천해 보려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한번은 이런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50년대, 청년으로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유학생활 할 때 독신총각들이 흔히 찾는 홍등가를 그는 잊기 위해 심각한 결단을 해야만 했다. 그는 당시 한번 윤락에 들어가면 내야하는 화대가 50마르크라는 것을 알고, 여자 생각이 날 때면 50마르크 씩을 촛불에 태워버렸다고 한다. 내가 유학하던 70년대에도 50마르크는 큰 돈이었는데 안 박사님은 그 시대에 50마르크는 아마 한 달 생활비 절반 정도의 큰 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귀한 돈을 태우면서, 육체적 정욕을 잊으려고 노력하는 안 박사님의 결단은 가히 중세의 수도사들이나 할 수 있는, 금욕주의적 괴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파격적인 괴짜의 모습이 그의 삶 전체에 누벼져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의 예수에 대한 사랑, 민중의 대한 집요한 애정, 그리고 김대중에 대한 편애에 가까운 신뢰와 기대도 이런 그의 스타일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는 한번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해 주신 적이 있다. 정치를 하려면 지옥 갈 생각을 하고 하라는 것이다. 정치의 목적은 선한 일을 하기 위한 것이더라도 권력을 잡고 행사하는 정치적 행동과정은 악을 저지르지 않고, 즉 비리 없이 하기는 어렵다는 말씀이다. 민주화 운동을 하시면서 김대중 선생과 함께 독재가 무너진 뒤의 정치적 과정까지 깊이 생각해 보신 흔적을 나는 안 박사님과의 대화를 통해 진하게 느껴볼 수 있었다. 아마도 안 박사님 스스로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지옥에 갈 각오를 하면서도 정치를 해야 하지 않나 생각을 해보신 것 같다. 나치가 멸망한 뒤 반나치 운동하던 고백교회 신학자들 가운데는 교회로 돌아가지 않고 정치를 해서 국회의원도 되고 시장도 된 분들이 있다. 사실 안 박사님이 민주화 이후에 정치 참여를 어떻게 결단하실 건가 하는 것이 나에게도 큰 관심이었고, 교회와 정치, 신앙적 행동과 정치적 참여 사이의 긴장관계를 해결하는 한 모델이 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안 박사님은 김대중 선생의 강한 권유가 있었음직 하지만 결국 정당정치적인 참여를 않고, 신학과 교회에 머무는 길을 택하셨다. 결코 지옥 가기가 싫어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나에게는 지옥 갈 생각하고, 뛰어들어 정치를 해야한다고 강조하신 분이다. 본인 스스로도 그런 생각은 해보셨을 것이고 또 능히 할 수도 있는 분이라고 생각되지만, 아마도 민중신학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못해, 또 나빠진 건강을 염려하셔서 남은 여생을 한국 교회와 신학적 요구에 바치시기로 결단하신 것이 아닌가 짐작해본다. 그러나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함께 해오던 지난 20여 년간의 만남과 대화를 돌이켜보면, 안 박사님은 정치적 흐름과 정세의 분석에도 날카로운 시각과 전략적 사고를 갖고 계신 분이었음을 느끼곤 했다. 정치를 하셨어도 신선한 충격과 발전을 일으켰을 법하지만, 당신은 뛰는 심장을 염려하시면서, 오히려 박영숙 선생님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시고 부인에게 정치를 넘긴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안병무 박사님을 사귀면서 그의 내면세계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될수록 나는 그분과 공감하는 부분을 넓혀가게 되었다. 신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신학의 고민, 기독교 신앙과 사회참여의 긴장관계, 교회와 정치문제, 민주화와 민족통일의 문제, 민중에대한 사랑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사이의 관계와 갈등, 평신도 설교자와 목회자 사이의 갈등과 조화 문제, 청교도적 금욕주의와 성해방의 문제, 안 박사님은 내가 고민하며 추구하던 문제를 이미 훨씬 오래 전에 고민하셨을 뿐만 아니라, 용기 있고 멋진 결단들을 해가시면서 실천의 모델을 만들어 가신 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의 삶과 행동의 결단에 한 모델이 되었음을 물론 적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된 것 같다.


2


이러한 안 박사님과 나의 만남의 출발점이 된 것은 1972년 11월 독일 바일슈타인(Beilstein)에서였다. 물론 한국에서 내가 크리스챤아카데미 간사로 교회갱신위원회를 운영하였을 때 간간히 뵌 적은 있지만 개인적으로 만나고 사귈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독일 땅에서 독일 유학의 선배를 한독 기독자의 만남을 위한 협의 회의에서 사흘간이나 만나게 되면서 나는 처음으로 안 박사님을 잘 알 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이 모임과 만남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국내의 그리스도인들이 고백교회의 정신으로 뭉치고 투쟁하며 헌신하기로 결단하는 역사적인 모멘트와 장이 되었다.
이 바일슈타인에서의 만남은 나와 안 박사님의 만남의 시발점이었을 뿐 아니라, 한국과 독일의 선교협력 관계를 발전시키는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 만남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안 박사님을 추억하면서 한국선교관계의 한 중요한 토대가 된 이 바일슈타인의 모임에 관해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안 박사님의 업적과 공헌 중 한독교회의 선교관계와 신학적 연대관계를 강화한 것이 뺄 수 없는 중요한 점인데, 바일슈타인 모임은 바로 지난 25년간(72-97년) 한독 교회 관계의 발전에 중요한 초석을 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특히 독일에 머물면서 안 박사님의 독일에서의 활동과 수고를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독일인들과 독일교회를 움직여 한국 교회와 민주화운동을 지원케 하는 데 안 박사님의 영향과 힘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을 잘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독관계는 나의 삶과 활동에서 하나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는데 안 박사님의 영향도 적지 않게 있었을 것으로 기억된다.
1972년 이전까지만 해도 독일과 한국의 교회적 관계는 별로 공식적인 것이 없었다. 단지 60년대 중반부터 크리스챤아카데미가 독일 에반겔리쉬아카데미와 연대를 맺으면서 강원용 목사님을 비롯한 아카데미 관계자들의 방문 교류가 있었고, WCC를 통해 독일교회의 신학생지원 장학금이 제공되어 몇몇 학생들이 유학을 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70년대에 와서 한국 간호원 광부들이 서독으로 수천 명씩 파견되어 와서 일하며 살게 되면서 한국인의 존재가 독일에 크게 부각되게 되었고, 한국에 대한 관심이 독일의 교회에서도 조금씩 생기기 시작하였다. 나도 WCC신학생 장학금을 받아 68년에 독일유학을 가게 되었지만 독일에 사는 한국인들이래야 대학도시마다 몇 사람씩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였으며 독일 전체에 몇백 명 있는 수준이었다. 독일 사람들은 일본은 잘 알고 우호국으로 좋아했지만, 한국인이라고 하면 실망하거나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게 현실이었다.
그러다가 60년대 중반부터 몇백 명씩 오기 시작한 한국 간호원들이 70년대에 와서 광부들까지 오면서 한국인 수가 5천 명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한국인들은 곳곳에 한인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리며, 독일 교회에다 협력을 구하게 되었다. 한인교회들이라야 간호원 광부들이 자체적으로 조직해서 한국인 유학생 중 목사나 신학생을 설교자로 초빙하는 정도의 미조직 교회였다. 그러나 한인교회들이 차츰 독일교회에다 요청해서 예배처소를 빌리는 것 외에 교역자 사례금 지원이나 노동자들의 사회상담 문제, 귀국 문제까지 지원을 요청해오면서 독일교회는 한국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나라의 교회로서 어느 정도 한국 교회에 대한 책임과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광산지역과 병원이 있는 도시에서 형성된 한인교회들이 재독한인교회를 조직하자는 움직임이 70년경부터 일어나게 되었다.
재독한인교회가 생기고 한독교회의 관계가 움트기 시작하는 무렵이 71년, 72년이었는데 이 시기가 한국에서는 군사정권이 장기집권과 유신체제라는 독재호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시기와 맞물렸다. 특히 72년은 10월유신이라는 쿠데타적 장기집권화가 시작된 해로 한국인들은 국내외적으로 절망과 탄식을 느끼며 이 깜깜한 어둠의 시기를 어떻게 극복해갈 것인가, 체념하고 말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점이었다. 유학생들 사이에는 일부 비판적인 의식을 가진 분들이 있었지만, 67년 동백림사건과 유학생 70여명 납치 강제귀국 사건이 있은 후라서 대학도시마다 정보원 감시원이 있다는 소문이 무성해 서로 말을 하지 않는 험악한 분위기였다. 대학도시마다 누구는 대사관과 가깝다, 누구는 정보부원이다, 누구는 북한장학금을 받고 있다는 등 불신과 의심의 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나 유신체제를 잘못 비판했다가는 귀국이 어렵다든가 여권연장이 곤란하다는 소문이 유학생들 사이에도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유학생들끼리 만나도 정치 이야기는 금물이었다. 누가 정치비판을 하면 곧 사람들은 북한의 간첩아닌가, 남한의 정보부원이 아닌가 하고 오해를 하곤 했다.
이러한 불신의 상황을 해외 교포들인 독일 유학생 사회에서라도 극복해 보자고 나는 72년에 한국 유학생 세미나를 조직하였다. 독일 에큐메니칼 장학회(OSW)의 지원을 받아 72년 11월 2-4일에 베스트팔렌 주 필릭스트에서 36명의 유학생들이 모인 세미나를 열었다. 여기서는 “지성인들의 사회참여”, “민주주의와 경제발전” 등이 발표되고 토론되었다. 한국 상황에 대한 비판적 견해들이 표출되었지만, 아직도 서로를 믿을 수가 없어 공개석상에서는 말조심을 하고, 돌려서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사흘을 함께 지내면서 우리는 누가 진보적 의식을 갖고 민주화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인지를 구별할 수가 있었고 동지와 적을 분간해 낼 수 있었다.
필릭스트의 유학생세미나를 막 마치고 돌아왔는데 나는 서남독선교부(EMS)의 동아시아 책임강사인 슈나이스 목사에게서 한독 교회의 신학과 선교관계자들의 공동세미나를 개최하니 참석해달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선교(중국, 일본, 홍콩)를 담당했던 동아시아 선교회(DOAM)의 강사역할을 하는 슈나이스 목사는 일본 교회와 밀접한 관계 속에 있었는데, 점차 독일 교회에서 한국 교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인 목사, 신학생, 유학생들과도 만나서 협의할 필요가 인식되었다. 한국 교회와의 선교협력관계를 한국의 모교회와 열기 전에 독일에 와 있는 한국의 신학자나 크리스천들과 먼저 협의하자는 제안이었다. 마침 가족들이 함께 여행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해서 나는 아내와 두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기차를 타고 하일브론 근처에 있는 바일슈타인으로 갔다.
나는 여기서 뜻밖에 안병무 박사님이 주제 강사로 와 계신 것을 보고 놀랐다. 제네바의 WCC의 직원으로 계신 박상증 목사님도 오셨고, 독일에 와서 목회를 하시는 장성환 목사, 정하은 목사, 이화선 목사, 이영빈 목사 등이 와 계셨고, 김철현 박사와 WCC 신학생장학금으로 공부하고 있던 다수의 신학생과 한인교회 대표자들이 참석했다. 참가자는 한국인 15명과 독일인 9명이었다. 11월 27일-29일에 모인 제1차 한독그리스도인 협의회에서는 한국과 독일의 신학과 교회 선교의 형편에 대해 서로 의견 교환을 하고 사귐을 갖는 기회였다. 여기서 안병무 박사의 주제강연은 당시의 노트를 찾아보니 “전통적 신관의 문제”였다. 안 박사님은 리차드 김의 순교자 이야기를 하시면서 동양인의 신관에 대해 말씀하시었다. 서양인은 충만한 신, 분명한 진리로서의 신을 추구하지만, 동양인들은 불교에서처럼 빈 것을, 열반과 같은 것을 추구한다고 하였다. 『순교자』에서 암시되듯이 신은 확실한 대답이 아니라는 것, 환상과 거짓으로라도 신자들을 위로하는 진리가 아니라, 우리에게 고통 속에서 존재하며, 계속적인 물음으로 현존한다고 말씀하시었다. 동양에서는 신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오히려 침묵 속에서 만나는 분으로 표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날의 안 박사님의 발표는 정치적 내용이 전혀 없는 순수한 신학, 즉 아시아적 신관에 관한 것이었다. 그 뒤 박상증 목사님의 한독선교관계에 대한 발제나 정하은 박사의 베를린 한인교회의 이야기도 국내정치정세와 관련된 내용은 아니었다. 그러나 진짜 이야기와 대화는 공식 프로그램이 끝난 다음 한국인들끼리 모인 비공식 모임에서였다. 안 박사님은 한국의 유신체제는 1933년 히틀러의 영구집권과 같고 한국의 미래는 이제 나치독일처럼 되어간다는 것이었다. 공식 발제강연 때와는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본회퍼나 니묄러처럼 고백교회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내에서는 지금 정보부 경찰 군인들의 철저한 통제와 억압 때문에 꼼짝 못하니 해외에서라도 뭔가 움직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암시였다. 유신체제 하에서는 대학생들도 꼼짝할 수가 없고 철저히 통제되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선 해외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유신반대의사를 표명하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72년 11월 당시 우리 유학생들의 반응은 냉담할 수밖에 없었다. 장학금이 곧 떨어지고 공부 마치면 곧 귀국해야 하는데 비판의식은 있지만, 그러다 귀국을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 공통된 걱정이었다. 독일에 영주할 수 있는 사람은 해도 괜찮겠지만, 그래서 많은 논의를 하다가 우리는 우선 한국 상황을 더 주시해보면서 서로 정보와 자료교환을 하자는 것으로 결론을 맺었다. 그리고는 한국 사태에 대한 정보자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해서 나누기 위해 이영빈 목사, 김두환, 이상열, 3인을 책임위원으로 선정하고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이 당시에는 잘 몰랐으나 나중에 보니 이 모든 일들이 우연이 아니고 안병무 박사님이 독일에 오셔서 뭔가를 꾸미려고 하신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슈나이스 목사와 이런 한독그리스도인 세미나를 조직해 모임을 만든 것 자체가 깊은 뜻과 계획이 있는 일이었다. 안 박사님은 뭔가 긴 장래를 내다보시며 국내의 운동기반이 무너졌을 때 해외에서라도 고백교회나 민주화운동 같은 것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 불을 지피려고 일을 꾸며 나오셨는데 미련한 우리들은 그 뜻을 잘 모르고 소극적으로 냉담하게 반응했고 겨우 그럼 정보자료나 나누자고 동의한 것이다.
안 박사님은 아마 1차 바일슈타인 회의에서 실망하셨을지 모른다. 독일 유학생들이 패기가 없고 청년다운 용기와 모험심이 부족하다고 은근히 꾸짓는 것같은 말씀도 하신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안 박사님께서 힘들게 뿌려 놓으신 씨앗은 곧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국내 사정이 독재와 탄압의 심화로 비판적 여론이 해외에 번지게 된 이유도 있지만 73년이 되면서 유신체제를 그냥 묵과하고 살 수는 없다는 의식이 해외지식인과 종교인들 사이에도 점차 확산되게 되었다. 73년 4월 부활절에 남산삐라 사건으로 박형규 목사 등이 구속되고, 여름에 바르멘선언과 유사한 73년 한국그리스도인의 선언이 나오게 되면서 점차로 그리스도인들이 독재와 횡포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식을 표명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여기저기서 오가게 되었다. 자연히 우리는 73년 11월에 같은 바일슈타인서 모이기로 한 2차 한독그리스도인의 협의회를 고대하였다. 이번에 안병무 박사님이 다시 나오신다면 보다 적극적인 반응을 일으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마침 73년 11월 22-25일까지 제2차 바일슈타인 모임이 소집되었다. 보다 많은 한국인과 독일인들이 모였다. 1차 때의 두 배나 가까운 40여 명이 모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안병무 박사님이 나오시지 못했다. 탄압의 정세가 심해지니까 출국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대신 동경에 계시는 강문규 총무님이 오셨고, 한신대 교수로 연구차 나오신 박봉랑 박사와 장일조 교수가 함께 참석하였다. 해외 기독자들이 연대하기 위해서 제네바의 박상증 목사님, 미국 뉴욕의 림순만 박사와 신성국 목사님도 참석하였다. 주제도 이번에는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 기독교인의 정치 사회적 참여” 문제였다. 독일에서 한인교회를 목회하시는 목사님들이 다 오시고 신학생 장학생들이 거의 다 초청되었고, 평신도 대표들도 참석했으며, 아울러 일본 미국 스위스의 참가자들도 있어서 실로 2차 바일슈타인 모임은 해외의 그리스도인들이 국내에서 반독재 민주화와 신앙의 자유수호를 위해 고난받고 투쟁하는 그리스도인들(당시엔 박형규 목사, 은명기 목사, NCC, 그리고 기독학생운동 등)과 연대하는 결단을 내리는 역사적인 모임이었다. 그리고 특히 독일 안에서의 한인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반독재 저항노선으로 나가게끔 결단하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아울러 한독교회의 선교협력관계가 반독재 민주화 인권 사회선교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결정적 계기가 된 모임이기도 했다.
이 바일슈타인 회의에서 참가자들은 먼저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에 대한 토의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에 대한 두 왕국론의 신학적 문제들을 진지하게 논의했다. 어떤 정치적 이념과 노선이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유사한가? 독재와 악의 세력이 지배할 때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게 신앙적인가에 대한 열띤 논쟁이 있었다. 신학과 정치를 혼동하지 말라는 주장에 대해 림순만 박사는 “not to take action is to take action”이란 말로 대꾸하며 침묵도 곧 어떤 태도의 표시라고 하면서 고백적 행동을 주장했다. 많은 신학생과 유학생들은 아직 어리둥절해서 어떻게 우리 신앙을 정치적 의사표현으로 나타내느냐고 주저했지만, 분위기는 이미 이제는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고 선언과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리고 국내와 국외를 향해 반독재선언을 한 뒤 해외의 크리스천들이 연대하고 네트웍을 만들어 국내운동을 지원하고 해외에서의 여론을 주도해가야 한다는 논의까지 하였다. 실로 바일슈타인 모임은 해외 그리스도인들이 바르멘협의회와 같았고 우리는 바르멘선언과 같은 아주 신앙적이면서도 반독재 노선과 의사를 분명히 밝히는, 그러면서도 너무 정치적으로 들리지 않는 선언문을 만들어 발표하기로 하였다.
결국 어려운 선언문 초안작성의 임무가 나에게 떨어졌고, 나는 온갖 요구와 토론들 관점들을 종합하면서 여러 입장과 견해의 참가자들을 만족시킬 선언문을 밤을 새워 기초해야만 했다. 해외 그리스도인들의 첫 공개 반독재선언문이 된 이 바일슈타인 선언은 그뒤로 독일에서의 한인교회와 한인 사회의 민주화운동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고, 독일교회가 한국 교회와의 선교협력을 발전시키는 데도 중요한 근거가 되는 문서가 되었다. 이 선언문에 누가 서명하며 이름을 공개할 것인가의 논쟁도 꽤 있었다. 그러나 결국 서명은 하되 공개하지 않고 “재독한국 그리스도인 유지일동”이라고만 하기로 했다. 사실 선언문에 서명할 때는 심각한 표정으로 사생결단이나 하는 듯 비밀투표 형식으로 했다. 그러나 귀국을 염려한 몇몇 유학생을 빼고는 거의 모든 참가자들이 서명을 했다. 나는 이 바일슈타인의 모임과 선언문이 안병무 박사가 뿌린 씨앗의 한 열매라고 생각하며, 이 기회에 전문을 기록해 둔다.


3


재독 한국 그리스도인의 선언(바일슈타인 선언)


이땅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현실적으로 증거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불의한 권력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신앙과 양심에 따라 비판하고 행동해야 할 것을 확신한다. 악의 권세와 세상의 고통에서부터 인간을 해방하기 위해 인간의 구체적 역사와 현실의 부조리에 도전한 그리스도가 곧 우리의 주님이기에 우리는 떠나온 조국의 비민주적 현실을 고발하며 이 현실을 초래한 국민으로서의 공동적인 책임을 통감한다.
한국의 현정권은 「10월 유신」이란 위장된 구실 아래 민주적 헌정질서를 하루 아침에 파괴하고, 일인 영구집권의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으며, 이에 항거하는 양식있는 지성인과 학생 및 종교인을 비인도적인 방법으로 탄압하고 제어하고 있다. 국민 대중은 집회 결사의 자유는 물론, 의사표현의 자유마저 제도적으로 박탈당하고 정보정치와 공포정치의 이성을 잃은 횡포 속에 인간의 존엄마저 짓밟히고 있다. 사회정의와 분배의 공정을 도외시한 경제정책은 빈부격차의 양극화와 대중생활의 곤핍을 초래하였고, 극도에 달한 조직적 부정부패는 국민 도의의 만성적 타락과 자주경제건설의 실패를 낳게 했다. 학원과 언론이 정보기구에 의해 완전 통제되고 매수와 조작과 압력을 통해 비판과 양심의 세력마저도 분쇄되고 있는 현 사회구조 속에서는 여론과 민주적 참여를 통한 사회개혁의 가능성은 거의 전부 배제되고 말았다. 우리는 민주시민으로서 가난하고 억눌린 자를 도우라는 그리스도의 교훈을 실천하려던 은명기 목사와 박형규 목사가 어떻게 그 신앙의 자유마저 유린된 채 구속되었나를 지켜 보았다. 우리는 함석헌 선생, 김재준 목사, 지학순 주교, 천관우 선생을 비롯한 15인 종교인 지성인들이 순교적인 각오로써 외친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이 국내 신문의 한 줄에도 보도될 수 없는 민주정치의 파국을 경험하였다. 우리 주변의 또 누가 다음번 희생자가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우리 재독한인 그리스도인들은 인권과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투쟁하다가 고난을 당하고 있는 국내외의 민주수호자들과 함께 공동의 유대의식을 가지며 우리의 빛난 조국에 다시는 불의와 독재가 지배하지 못하도록 각 방면에서 최선을 다 할 것을 엄숙히 결의한다. 이러한 결의의 표명과 함께 비록 우리들 자신에게 어떠한 위협이 닥쳐온다 해도, 지금 이때는 불의에 저항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길인 줄 믿기에 진리를 거슬러 권력에 존중하거나 타협하지 않을 것을 거듭 다짐한다.
뜻을 같이 하는 국내외 동포들의 공동적 참여와 세계교회의 성원과 기도를 바란다.


1973년 11월 25일
한국그리스도인 유지 일동


재독한국 그리스도인의 바일슈타인 선언에는 다음과 같은 인사들이 서명했다. 그때는 공개하지 않기로 했지만 2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공개해도 좋다고 생각되어 기억되는 대로 적는다.
배동인, 방성, 장일조, 장성환, 조남홍, 정하은, 강문규, 김창락, 김균진, 김영한, 이삼열, 이화선, 이영빈, 오인탁, 박경서, 박봉랑, 박상증, 리준모, 림순만, 신성국, 원종태, 오대석 등 20여 명이 서명했고, 독일인으로는 게르하트 브라이덴슈타인(부광석), 게르하트 후릿츠, 폴 슈나이스, 옌스팀, 클라우스 피베거, 하트빅 리비히, 볼프강 겔러 등 10여 명이 동조 서명을 했다. 안병무 박사님이 2차 회의에도 참석하셨다면 물론 서명하셨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 선언문을 초안하고 이를 국내외와 세계 기독교 기관에 번역해 발송하는 일을 하면서 안병무 선배님께 1차 바일슈타인회의 때 부탁받은 과제를 이행한 것 같은 후련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물론 92년 말에 내가 유학하던 괴팅겐대학으로 나를 방문해 주신 박형규 목사님께서 귀국하시는 길에 무거운 마음으로 비행기를 타신다고 타이페이 공항에서 엽서를 주시고는 결국 73년에 부활절 사건으로 감옥에 가 계신데, 박 목사님께도 조그만 빚을 갚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명단을 보면 결국 그 다음 해 74년 독일에서 조직적으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일으킨 민주사회건설 협의회가 출범하게 되는데 창립선언 발기인 55명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 참여한 10여 명이 이미 한 해 전 바일슈타인 선언에 참여했음을 알 수있다. 개인의 사정상 불가피하게 서명을 하지 못한 분들도 있지만, 그리고 그런 분들이 나중에 무척 괴로워하고 미안해 하는 뜻을 표하기도 했지만, 가혹한 독재정권의 치하에서 전략적으로 서명하지 못하지만, 뜻을 같이 한다는 의사를 표해온 많은 분들에게도 우리는 그 이후 동참의 기회를 열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같이 서명하고 고락을 나누며 동지가 되겠다고 결단하는 행위가 얼마나 중요하며 큰 힘이 되는가 하는 것은 이때에 절실하게 경험한 바 있다.
당시의 선언문을 지금 읽어보면 유신체제 초기에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의 깊은 신앙적 고민을 한 흔적이 드러난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과격한 선언을 피하고 기독교인으로서 양심적 고백을 진지하게 표현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사실 본인이 초안했지만 3박 4일 동안 40여 명의 참가자들이 밤낮 열변을 토하며 논쟁하고 고민하면서 합의한 토론의 결실이었다. 당시 우리들의 의식수준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점에서 누가 개인적으로 만든 선언문과는 의미와 비중이 다르다. 우리는 여기서 안병무 박사님의 부탁과 박형규 목사님 등 국내 신앙인들이 만들어 발표한 73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을 참조하면서 우리들의 신앙고백과 결단을 표명한 것이다. 이 점에서 73년 바일슈타인선언은 73년 국내그리스도인들의 선언에 대한 해외 그리스도인들의 화답형식의 선언문이었고, 이때부터 국내외적 연대와 동지의식이 더욱 공고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 뒤로 바일슈타인에서 시작된 한독그리스도인의 만남과 신학적 협의회는 매년 계속되었고 점점 크게 확산되어 독일에서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보루가 되었다. 특히 73년 바일슈타인 선언이 나온 뒤 이 선언문은 WCC를 통해 로마의 IDOC문서로 번역되어 전세계로 알려졌고, 독일 교회의 호응과 한국의 반독재 교회들(NCC 중심의)에 대한 지원의지가 높아져 갔다. 한독 교회 관계는 사실 73년을 기점으로 크게 발전하게 된다. 고난당하는 한국 교회를 지원하고 도와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함부르크에 있는 세계선교본부(EMW) 산하에 동아시아 위원회가 생겨 일본과 함께 한국 교회를 전적으로 다루는 기구가 생기게 되었다. 여기엔 푸릿츠 목사가 책임강사로 일하게 되었고, 서남독 선교부(EMS)의 슈나이스 목사, 베를린 선교부(BMW)의 알부르샤트 목사와 독일 교회 총연합회 외무국(KA)의 동아시아 강사 등 관련 기관의 대표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한국 사태를 논의하게 되었다.
이렇게 한국의 억압받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지원하려는 독일교회 동아시아위원회 결성이 이후 한독 교회의 선교협력 관계에 결정적 공헌을 하게 되었다. 이 위원회는 곧 한국 NCC에 정식으로 선교협력 관계를 맺자고 제안하게 되며 이것이 한독교회협의회로 발전하게 된다. 제1차 한독교회협의회가 드디어 74년 6월 25-28일 뒤센돌프에서 열리게 되었다. 명실공히 한독 교회 관계가 공식으로 열리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한국 교회 대표로는 KNCC 총무 김관석 목사, 강원용 목사(기장), 김윤식 목사(예장), 김창의(감리교), 김해득 사령관(구세군), 노정현 교수, 이문영 교수님이 오셨다. 안병무 박사님과 이영민 기장총무님이 공식대표는 아니었지만 참관하시고 발언도 하시었는데, 이 모임 뒤에 있을 기장과 서남독 선교부 회의를 주도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여기서 정식으로 한독교회협정서가 처음으로(74년 6월 27일 뒷셀도르프) 체결된다. 한독 교회 관계는 아카데미운동의 협력으로 시작되어 1965년 가을 샤프 감독, 비쉬만 외무국장이 한국 교회를 공식방문하는 것으로 막이 열린다. 그 뒤 67년에 한국 NCC에 한독위원회가 구성되고 독일교회선교본부에 극동위원회가 구성되어 형식적인 교류 관계에 들어갔다. 주로 파독 간호원, 광부들의 신앙문제를 위해 목회자를 파송하는 일을 연락해 왔다. 그러나 74년 1차 한독교회협의회는 그 협정서에 드러나듯 독재권력 아래 고통당하는 교회간의 유대관계, 사회선교와 봉사, 발전사업 등에서의 협력 관계, 재독한인 노동자들의 권익옹호와 한인교회의 지원 등 양국 교회 간의 선교협력 관계를 확대하고 체계화시켰다. 그 뒤 매 2년마다 한국과 독일을 번갈아 가며 모인 한독교회협의회는 그뒤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데뿐만 아니라, 산업선교, 빈민선교, 여성운동, 청년운동을 지원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한독교회의 선교협력 관계를 강화하는 데는 한독교회협의회가 토대가 되었지만 실질적인 선교협력 관계는 이 우산 아래서 반독재노선과 고백교회의 전통을 잇는 한국기독교장로회(PROK)와 서남독선교부의 공동 사업들을 통해서 이루어져 갔다. 여기에 안병무 박사님이 핵심적 역할을 하셨음은 두말 할 것 없다. 74년 7월 1-3일 슈투트가르트의 서남독선교본부(EMS)에서는 기독교장로회와 서남독선교부의 선교정책협의회가 열렸는데 한독교회협의회에 오신 한국 대표들이 거의 모두 참석했고, 여기에 안병무 박사님과 기장총무 이영민 목사님이 참석하셨다. 3일 동안의 회의에서는 한국 교회의 고백교회적 발전과 지원을 위해서는 신학적 연구와 선교적 교육을 발전시키고 지원해야 한다는 결의를 이끌어내었다. 이 결과로 한국신학연구소 프로젝트와 기장의 선교교육원프로젝트가 성사된 것은 너무 유명한 일이다. 나는 이 모임들에서 통역 겸 사회 문제 발제자로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해서 안병무 박사님의 역설과 노력을 지켜보았다. 어쩌면 선후배가 함께 만나 독일 교회를 참여시키는 데 노력한 멋진 플레이였다고 생각한다.
한편 바일슈타인에서 72년에 시작한 한독그리스도인의 모임은 매년 가을 계속되었는데 특히 74년엔 한독교회협의회에 고무되어 가장 큰 규모로 거행하여, 12월 2-6일 프랑크푸르트 근처 타우누스 숲속의 도르프바일 가족휴양소(콘도미니엄)에서 60여 명이 모였는데 특히 이때 캐나다에 계시던 김재준 박사님을 주강사로 모시었다. 이미 74년 3월에는 독일에서 민주화운동의 구성체인 “재독한인 민주사회건설협의회”가 조직되었기 때문에 이 기회를 이용하여 김재준 목사님을 모시고 독일 여러 도시와 스웨덴에서까지 시국강연회를 열었다. 반독재민주화운동이 국내외에서 열기를 뿜던 1974년 겨울이었다. 독일 교회 선교부가 돈을 대고 주최해 준 한독그리스도인의 모임은 실로 재독 한인들의 민주화운동의 한 거점이 되고 중요한 지원세력이 되었다. 한독교회협의회와 선교협력 관계를 발전시킨 모태이기도 했다. 나는 이런 인연으로 74년부터는 독일교회 선교본부(EMW)의 동아시아위원회에 상임고문이 되어 3개월에 한 번씩 모이는 회의에 참석하고 한독 교회 관계 일들을 자문하는 일을 하게 되었고 이것은 82년 내가 귀국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3년만에 나를 고국에 돌아올 수 있게 해준 제4차 한독교회협의회(1981년 6월, 서울 크리스챤아카데미)도 한국 교회의 통일연구원을 발족시킨 계기가 되었다.
나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한독 교회 관계의 일의 배경에는 나와 72년에 독일에서 만난 안병무 박사님과의 인연과 협력관계, 선후배관계가 적지 않게 작용했다. 한독 교회의 선교협력 관계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발전시킨 중요한 산파역을 안병무 박사님께서 하신 것이다.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뜻이었고 인도하시었음을 안 박사님을 추억할 때마다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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