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추모문집

2017.07.04 00:52

내가 만난 안 선생

조회 수 114
Extra Form
저자 도기순

(향린교회 은퇴 장로)


먼저 안 선생이 예수 믿게 된 동기를 들은 대로 써야겠다. 안 선생은 1922년에 평남 신안주에서 태어나서 두 살 때 어머니 등에 업혀서 만주 간도 화룡현 달라재라는 동네로 이사해 살게 되었다. 이 동리에 와서 아이들하고 놀다가 어느 교회에 십자가가 있는 것을 보고 저게 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거기에 어떤 사람이 달려 죽었다고 하더란다. 그리고 얼마 지나서 다른 동네로 갔는데 거기에 또 십자가가 있어 보고 또 물으니 역시 같은 말을 해서 호기심에 도대체 어떤 사람이 왜 달려 죽었을까 알아보려고 교회에 찾아가서 열심히 주일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것이 정말 예수에게 미친 사람이 된 것이다.
내가 안 선생을 알게 된 것은 안 선생이 용정에서 은진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그 때 은진학교 종교부에서 합성리라는 마을에 교회를 세웠다. 나는 같은 계통의 학교인 명신학교 종교부장이었고 안 선생은 은진학교 종교부장이었다. 은진학교 종교부에서 우리 학교에 주일학교를 좀 도와달라는 교사 신청이 들어옴으로 그 때에 내 친구 한 사람을 데리고 그 교회로 가서 안 선생을 알게 되었다. 그 때에 이 종교부장이라는 중학생이 설교를 하는데 놀라웠다. 사실 그 시대의 중학생이 지금의 대학생 수준이었다고 생각된다. 또 그 시절에 은진·명신 두 학교 가까운 곳에 동산교회라는 아주 큰 교회가 있었는데 매일 새벽기도에 백여 명의 학생들이 나와 기도했다. 당시의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였다. 나 역시 눈물과 절규의 기도를 하였으니까. 이 새벽기도에서 만난 신앙의 동지들이 장하구, 안병무, 최봉삼, 장덕순 등이었고 동산교회 야학 선생들이었다. 그 후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장하구, 안병무, 최봉삼은 일본 유학을 갔는데 몇년 후 일본학도병 때문에 도망쳐 만주로 나와서 흩어져 있는 동안에 안 선생은 용정과 연길 사이에 있는 모아산교회라는 개척교회에서(이 교회를 세운 분이 장덕순의 할아버지였다) 전도사로 목회를 했다. 이 때부터 안 선생은 목사 못지 않은 훌륭한 목회자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안 전도사에게 빠졌었다. 나는 연길에 있으면서 가끔 설교를 들으러 갔다. 설교며 기도며 정말 너무 감격스러운 눈물의 예배였다.
이 와중에 이 친구들의 중매로 최봉삼과 나는 연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학도병으로 숨어지낼 때였다. 결혼식 날 나의 집에서 이 친구들이 밤에 합숙을 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장하구, 안병무, 최봉삼, 장덕순 넷이 둘러 앉아서 나를 가운데 앉으라고 하더니 지금 새 신앙동지 한 사람을 환영한다면서 무릎꿇고 간절한 기도를 했다. 아마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다 했던 것 같다. 얼마나 엄숙하고 진지한지 가슴이 후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때가 1944년 1월이었다. 이렇게 지내다가 45년 8월 15일에 왜정 손에서 벗어나는 8·15해방의 날은 정말 가슴이 터질 정도로 환성을 올린 날이었다. 나는 이 때에 문득 남녀 학생들이 용정 동산교회에서 매일 새벽에 하나님께 드린 기도를 들어 주셨구나 하는 감격에 정말 ‘하나님,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시듯 우리 민족을 왜정 압제의 손에서 해방케 하시는군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외쳤다.
8 15 해방 후 만주에서 살 수 없어 국경을 넘어 남한 땅으로 흩어졌다. 안 선생은 8·15 해방 후 서울에서 6·25 전까지 감리교 일신교회에서 전도사로 목회를 또 하셨다. 나와 최 장로는 옹진에서 살았는데 가끔 서울에 가면 꼭 일신교회에 가서 안 선생의 설교를 듣곤 했다. 시종일관 그의 설교는 감동적이었다. 이영환, 홍창의, 이 분들은 해방 후 서울에서 만난 신앙동지들이었다. 그러다가 6·25를 당해 피난길에 들었다. 안 선생은 전주, 우리는 부산, 장하구 선생은 대구로 갔다. 안 선생은 피난생활 중에 평신도교회 이상의 꿈을 실현하려고 53년에 서울로 와서는 남산 향린원에 정착하여 지금의 향린교회를 탄생시켰다. 누구보다도 피난 중에 안 선생은 동분서주하여 끝끝내는 53년 5월 17일(셋째 주일) 주일에 창립예배를 드렸다. 이때에 잠깐 지내는 동안에 차차 교인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때에 수요 저녁예배 후 난롯가에 모여앉아 성경공부하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안 선생이 맡아서 가르쳤다. 예배는 매주일 밤예배, 매수요예배를 드리고 주일에는 새벽예배도 드렸다. 안 선생은 저녁예배 시에는 531장을 많이 불렀다. 나는 지금도 이 찬송을 부를 때면 안 선생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찬송 부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때에 나이가 우리 모두 30대였는데 ….

531장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찬송가사를 쓰겠다.

 

1.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구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내 친구 나를 위로 못할 때 날 돕는 주여 함께 하소서
2. 내 사는 날이 속히 지나고 이 세상 영광 빨리 지나네
이 천지만물 모두 변하나 변찮는 주여 함께 하소서
3. 주 홀로 마귀 물리치시니 언제나 나와 함께 하소서
주같이 누가 보호하리까 사랑의 주여 함께 하소서
4. 이 육신 쇠해 눈을 감을 때 십자가 밝히 보여 주소서
내 모든 슬픔 위로하시고 생명의 주여 함께 하소서


정말 너무 마음에 닿는 구절 구절들이다.
안 선생은 설교 후에 기도를 하는데 언제나 감격스러운 눈물이 넘치는 기도였다. 정말 다정다감한 신앙인이었다. 이때에 가정(어머니와 동생) 생활은 정말 가난했다. 보리밥에 된장찌개뿐이었지만 그러나 항상 안 선생 주위에는 남녀노소할 것 없이 안 선생의 성경말씀을 배우고 듣느라고 모여들었다. 그의 생활은 정말 검소했다. 어느 날 안 선생 집에 갔더니 누가 새 양복을 해 주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입고 나가느냐며 누가 며칠 입다가 주었으면 좋겠다면서 봉삼이 형이 며칠 입다가 가져오라고 하기에 내가 “이제 보니까 안 선생님은 좀 바보스럽군요” 한 적이 있었다. 일생 사치라는 것을 모르고 사신 분이다. 예수님이 사신 생애가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전 생애를 바쳤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에 빠져 안 선생은 오직 예수에게 미쳐 사셨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 선생은 여러 친구들 중에도 특별히 보잘 것 없는 도기순과 최봉삼이를 끔직이 사랑해 주셨다.
안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 남편 최 장로가 2년 전에 돌아갔다. 안 선생 돌아가셨을 때 정말 너무 슬펐다. 신앙의 스승이었고 사랑과 위로의 친구의 죽음이었다. 자기가 죽을 것을 알았는지 안 선생이 돌아가기 10개월 전 주일 설교가 마지막 유언의 설교가 되었다. 설교 끝부분에 간곡히 하신 “여러분 어쨌든 내 생명 다하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은 놓지 마세요. 끝까지 이 십자가만은 붙잡아야 합니다” 하는 말씀을 의미깊게 받아들였는데, 이것이 향린교우들에게 부탁한 멋진 유언의 설교가 되었다. 정말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지 않고 살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전 생애가 그러한 삶을 살았기에 결국 민중신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아니겠는가?
안 선생은 죽기 전에 중국(만주) 간도 땅 고향인 산골짝 달라재, 용정, 해룡강 건너편 용강동 모아산교회에 꼭 가보는 것이 꿈이었다. 그 꿈따라 그곳에서 80세 할머니와 감격스러운 만남을 가졌다. 그 분은 “안 전도사님!” 하면서 달려왔고, 그 할머니 역시 죽기 전에 안 전도사를 만난 그 기쁨이 꿈만 같은 일이라 했다고 한다. 안 선생이 50년 전 자기의 발자취를 다시 밟아보고 돌아온 그 기쁨은 형언할 수 없는 감개무량한 큰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건강을 감당하기는 너무 역부족이었다. 점점 심장질환이 악화되어 일어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다 돌아가기 며칠 전 꿈 속에서 자신이 하얀 옷을 입고 천사처럼 훨훨 날아서 하늘로 올라가다가 깼다면서 동생 병택 씨 보고 “야 참 기분 좋더라” 하셨단다. 언젠가는 가야 하는 인생길, 그는 이런 모습으로 영원히 세상을 떠나 가시고 말았다.     
 


List of Articles
저자 제목
허병섭 한 제자의 몫 -민중신학 실천의 새 지평을 위하여
도여수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
이재정 오클로스의 신학
김경호 예수의 얼굴을 닮은 교회
김성재 예수 찾아, 예수 따라 산 안병무 선생님
안재웅 역사와 증언을 깨우쳐 준 스승
김진호 안병무의 민중신학적 예수상의 재발견
손규태 안병무: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서 산 구도자
민경배 안병무 시대
이만열 안병무 선생을 추억함
정양모 안병무 선생을 기린다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 안병무 선생님과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
송기득 안병무 선생과의 만남
강문규 안병무 박사의 지성과 인품을 회고한다
김찬국 안병무 박사의 삶과 신학적 업적을 기리며
윈프리드 글뤼어 안병무 박사를 기억하며 | 지금 이곳에서의 삶―종말론적인 사건 안에서
박용길 안병무 박사님
김진균 안병무 박사
김성환 안병무 님에 대한 나의 斷想
홍근수 안병무 교수의 삶과 유산
테오 순더마이어 안병무 교수에 대한 기억
하트무트 알부르샤트 안병무 교수를 기억하면서 20년의 경험과 관찰
볼프강 크뢰거 아듀, 안 교수!
문동환 실마리를 아브라함에게서 - 안병무의 공헌을 생각하면서
장상 신약학자 안병무
김재성 성서를 꿰뚫어 보는 눈
위르겐 몰트만 민중의 투쟁 속에 있는 희망 -안병무와의 우정 속에서
강원돈 두 전선에서 싸우신 분
스즈키 쇼조 동아시아의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님
박재순 내가 만난 안병무 선생님
김명수 내가 만난 안병무 선생
강원용 내가 만난 안병무 박사
임태수 내가 만난 안병무 박사
도기순 내가 만난 안 선생
하태영 나의 스승 안병무
황성규 나와 스승 안병무 선생
이삼열 그리스도인의 바일슈타인 선언
변형윤 그 양반은 너무 바쁘셔서 통화가 안 되요. 통화만 된다면야 …
여성숙 가볼까가 무슨 소리요?
오인탁 肉과 靈의 調和
홍창의 『野聲』과 안병무
김이곤 『現存』과 안병무, 그리고 나
한완상 〈들의 소리〉 心園 안병무 박사를 생각하며
김창락 “그 쪽 학교 선생은 진짜 선생님입니다”
김경재 ‘몸의 신학’을 가르쳐 준 정열과 지성의 신학자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