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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0:51

내가 만난 안병무 박사

조회 수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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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강원용

(크리스챤아카데미 이사장)


내가 안병무 박사를 처음 만난 곳은 선구자들의 고향인 간도 용정에서였다.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한 것이 1935년이었는데 안 박사는 내 기억에 나보다 1년인가 2년 늦게 우리 학교에 들어왔다. 그 당시 기독학생들이 모이는 모임을 종교부라 불렀고 2학년 때부터 내가 학생회장과 종교부장을 겸해 맡았는데 안 박사는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매우 돋보이는 학생이었다. 발표 때마다 특유의 이론을 전개하였으며, 주말이면 시골에 있는 교회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용정을 떠난 후에는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해방 후 서울에 와서 기독학생운동을 하면서 안 박사를 다시 만났다. 그때 안 박사는 서울대학교에서 기독학생운동을 하고 있었다. 1947년이었다고 기억되는데 서울 종로 YMCA에서 열린 한국기독학생총연합회(KSCF) 창립 총회에서 서울대학교 대표들은 기독학생운동의 세속화를 규탄하며 퇴장해버렸다. 그 당시의 서울대학교 기독학생들은 신사훈 박사의 견해인 현대 한국 교회는 부패해서 소망이 없으니 “새싹”운동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거나, 함석헌 선생님의 영향을 받은 무교회주의적 경향을 따르는 학생들도 많이 있었다.
안 박사도 그 당시 독실한 기독교신앙을 가진 젊은이로서 기성교회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기성교회에 대한 강한 비판을 하면서도 교회를 떠날 수는 없어서 가까운 동지들과 교회를 세웠다. 소위 성직자를 배제하고 순 평신도들로 구성된 현재의 향린교회 전신인 교회를 세우는 데 주동역할을 했다. 또 극히 가까운 동지들이 동남동녀(童男童女)로 평생 살 것을 다짐하기도 하고 『야성』(野聲)이란 잡지를 펴내기도 했다. 그 당시 기성교회 테두리 안에서 교회의 개혁을 주장해왔던 나와 안 박사의 길은 서로 달랐으나 낡고 병든 교회를 새롭게 개혁해야 한다는 입장은 같은 것이었다.
그 당시에 내 머리에 각인된 안병무는 개혁주의적이면서 퓨리탄적인 기질을 풍겼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의 이런 사고는 내가 기억하기로는 독일 유학시절에 많이 달라진 것 같다. 그가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하던 때에 나는 그곳을 찾아갔고 단 둘이 오랜 시간 기탄없는 의견 교환을 했다. 그는 그 당시 서구문화와 동양문화와의 만남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당시에 전세계를 풍미했던 서유럽의 실존주의 사상과 동양의 유교와의 비교연구에 심취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그가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철학과 문화와의 관계에서 검토해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안 박사가 공부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큰 변화가 있었다. 그가 세운 향린교회가 기독교장로회라는 기성교회 제도 속에 이미 들어왔고 동남동녀로 가톨릭의 신부처럼 살고자 했던 뜻도 여러 동지가 결혼해버림으로써 이미 달라져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안 박사의 생활도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평신도들의 교회가 제도권 안으로 들어온 것은 그에게는 매우 충격이었겠으나 그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여 향린교회에 봉사하기로 했다. 그런데 또 한번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결혼관이었다. 그는 서울대학교 학생 시절부터 재치있는 언변과 풍부한 유머 감각 등으로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가 여학생들과 친하면서도 소위 연애에 빠지지 않는 것은 내 추측으로는 그의 동남동녀 사고 때문인 것 같다. 노총각 중의 노총각이었던 안 박사는 그후 박영숙 씨와 결혼했다. 박영숙 씨는 그 동생 응호 등과 함께 우리 경동교회에 열심히 나오는 사람이었으므로 나와는 가까운 사이였다.
박영숙 씨와의 결혼은 정서적인 면에서 우리 둘 사이를 가깝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자적 기질은 타고난 성품이어서 그의 전공인 신약신학, 특히 마가복음의 “무리”(오클로스)에 초점을 맞추어 계속해서 신학계와 교계에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늦장가를 들어 따뜻한 가정의 사랑을 보기 시작한 지 오래지 않아 심장병으로 인한 고생이 시작되었다. 병이 매우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성모병원으로 찾아갔다. 병중에 있는 사람이지만 안 박사와는 보통 틀에 짜인 문병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일찍 죽을라면 장가를 가지 말지, 우리 영숙이를 젊은 과부를 만들면 용서못해” 했더니 중병으로 누워있는 침대에서 안 박사는 특유의 유머를 섞어가면서 우스개 소리를 했다. 병이 완쾌된 것은 아니지만 다행히도 많이 나아 안 박사는 그후로도 계속해서 활동을 했다.
나는 안병무를 생각하면 늘 그의 재치있는 유머부터 생각한다. 예를들면 3·1절 구국선언 사건으로 투옥되어 재판을 받을 때 다른 사람들에 비해 언도된 연수가 비교적 가벼웠는데 그는 최후 진술에서 “나는 금메달을 딸 것을 기대했는데 겨우 동메달을 주느냐”고 말했었다. 또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한·독교회협의회가 열렸을 때 한국에서 간 대표 몇 사람과 독일 교회지도자들이 저녁시간에 모여 자유롭게 유머 혹은 음담(와이담)내기를 했는데, 우리 측 이야기는 거의 안 박사가 주도해 독일 측이 완패하고 말았다.
그가 군사정부 독재 하에서 정치적 입장에서의 저항이라기보다는 신학적인, 특히 민중신학을 토대로 저항해 온 것은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에 주목을 받게 되었다. 나는 그의 민중신학을 잘 이해할 수도 없었고 나의 상식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기에 그의 신학에 관한 한 찬반을 피하며 대했다. 그러나 신구약성서를 서구적인 문화의 틀 속에서 키워온 오늘의 기독교신학은, 탈서구적인 제3세계의 신학으로 변해야 한다는 생각은 강하게 가지고 있었기에 내가 아는 많은 서구학자들이 그의 신학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역사적인 공헌이라고 생각한다.
아깝게도 그의 지병은 저명한 독일의 의사, 한국의 의사들도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완치 불가능인 상태에 이르렀으나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수심도 없이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연령적으로 보면 나보다도 아래 사람이 먼저 갔다는 것은 매우 애석하지만 그의 일생을 되돌아보면 큰 업적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의 일생을 평가할 때 창조적인 삶, 보존적인 삶, 파괴적인 삶으로 평가하는데 안 박사는 틀림없이 창조적인 삶을 산 사람이다. 창조적으로 산 사람의 일생은 그의 죽음과 함께 정지되어서는 안 된다.
안 박사의 많은 업적을 잘 정리하여 보존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겠지만 그가 살아오던 상황과는 매우 다른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는 속에서 그의 학문, 그의 삶이 재해석되어 새로운 창작, 새로운 역사 참여의 동인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기념사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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