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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문집

2017.07.04 01:17

나와 스승 안병무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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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황성규

(한신대학교 교수)


1. 시작하면서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 해였으니까 옛날이라고 할만하다. 그 때 광화문 시청 일대는 인산인해였다. 미국 대통령을 환영하는 인파였다. 그 환영 인파 속에 있었다는 한 여학생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 학생은 남달리 높은 곳에 있었는데 지나가는 미 대통령이 한참 자기만을 보며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것은 착각이지 사실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말을 서두에 씀은 나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다.
안 선생이 꽤 많이 나를 알아주고 나는 매우 그와 가까웠다고 자부한 편인데 그 같은 생각과 느낌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늦게야 깨닫고 그 동안 나도 착각에 빠졌었다는 것을 알았다.
모자이크 상은 여러 조각들이 모이고 어우러져 생긴다. 안 선생에 대한 나의 글은 그 여러 조각중의 하나일 것이지만 이 또한 없으면 그만큼 안 선생의 모습이 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자각증세가 있어서 서둘러 담아낸 것이다. 내가 그의 첫 강의를 듣고 그가 쓰고 편집한 잡지 『야성(野聲)』지를 탐독한 때부터 1996년 10월 19일 새벽 한 시쯤 급히 와달라는 박영숙 사모님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찾은 서울 중앙병원의 한 병실에서 안 선생의 임종을 지켜 본 때까지 무려 40여년 세월을 나는 안 선생과 여러 인연으로 함께한 시간과 공간이 많은 편이다. 따라서 나와 스승 안 병무 선생의 주제 속에 담을 내용이 실로 많지만 짧게 써야한다고 보기에 생각나는 일부를 적고자 한다.


2. 신학생이 만난 안병무


내가 안 선생을 처음 상면한 것은 1954년이었다. 지금의 한신대학교의 전신 한국신학대학은 당시 서울 역 앞 동자동 15번지에 자리잡고 있었고 나는 그 대학 학생이었다. 안 선생은 특강을 위해서 초대받은 강사였는데 그의 강연주제는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생애와 사상이었다. 신학 초년생으로서는 그의 강의가 흥미진진한 것은 말할 것 없고 그 내용이 명쾌해서 적어도 그의 강의 80%는 내가 재생해 낼 수 있으리만큼 내 지적 자산이 되었다. 장공 김재준 선생은 강의를 마치고 긴 계단을 내려가는 그를 가리켜 키에르케고르의 제자라 하셨지만, 46세에 독신을 면한 것이나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로서의 삶에 성실 하려고 한 것은 일찍 그가 심취한 실존주의 사상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처음 만난 선생을 더 가까이서 만난 것은 남산 향린원(지금은 동보성이라는 중국음식점)에 위치한 향린교회 예배에 참석하면서부터였다. 이 교회는 6·25 동란의 비극적 사건이 몇 젊은 신앙동지들을 결속시켜 한국에서 새 교회상을 지향하여 출발한 교회였기에 감수성 예민한 젊은 신학도들에게는 매우 신선했다. 몇 분이 번갈아 하는 설교 중에서 안 선생의 설교가 인상적이었고, 특히 그의 성서강의는 감동적이고 전혀 새로웠고 직설적이었다. 여기서 내가 직설적이라 함은 ‘한 밤중에 부부가 성교를 하는 중인데 하나님이 문을 빠끔히 열고 들여다보면 손을 저으며 하나님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달라고 할 것이라’는 말을 서슴치 않기 때문에 한 말이다. 이렇게 만난 안 선생일 뿐 개인적으로 가까이서 만나고 가르침 받을 기회는 없었다.


3. 사제지간으로 만나고 향린교회에서 동역자로 만나다


그분은 독일 유학생활을 하고 나는 나대로 신학교 생활과 군대생활을 하는 기간으로 약 10년 세월이 흘렀다. 군 제대 후 신학대학원에 복학하면서 다시 그러나 이제는 사제관계로서 그를 만났다. 그는 독일에서 10년 세월을 역사적 예수를 추구하면서 당시 신약학의 대가 불트만의 신학사상을 체계 있고도 폭넓게 연구하고 귀국한 직후라서 그의 공관복음서 강의는 좋았다. 새로웠다. 그의 강의가 먼지 낀 창을 깨끗이 닦고 성서의 세계를 보게 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하여튼 그랬다.
그의 강의를 들은 사람은 공감할 것인데 참으로 군더더기 없이 알맹이를 알알이 드러나게 하는 명강의였다. 그가 나의 석사논문 지도 교수였던 것이 내게는 행운이었지만 그분에게는 내가 부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바란 만큼 똑똑한 학생이 아니었을테니까! 어쨌든 나는 그가 귀국해서 학문적으로 배출한 제1호 석사인 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그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내가 그의 초제자(初弟子)라고 하면 그의 유머는 그 초(初) 제자가 아니라 당신을 넘어서는 초(超)제자라는 뜻이라고 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하곤 했다.
나는 대학원 졸업후 H 대학 독일어 시간강사로 출강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안 선생의 전화를 받았다. 이야기인즉 향린교회에 와서 함께 일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안 선생은 향린교회의 담임자로서 설교를 하고 계셨다. 이 교회가 본래 평신도교회의 특성을 가졌기에 평신도 신학자 안병무 박사가 교회 책임자였고 그를 도와 목회(?)할 부담임자를 찾던 터였던 것 같다. 10여년 전의 향린교회를 연상하긴 했어도 당시의 교회 사정을 모른 채 정확히 말해서 알아보려고도 않은 채로 ‘예’라고 대답함으로써 나는 안 선생과의 사제인연에다 동역자(?)라는 또 하나의 만남과 관계를 갖게 되었다. 만 15개월을 나는 안 선생을 모시고 일했다. 그는 학자로서 명강의를 했고 설교자로서 심오한 말씀을 선포했다. 그의 말씀은 실로 깊이 있고 뜻은 새로웠다.
자연히 그와 단 둘이 마주 앉게 된 기회가 많았다. 때로는 속으로 놀랄 만큼 자신의 허물(?)을 털어놓는다. 나를 오랫동안 감동하게 한 말씀중의 하나는 그의 청빈성이다. 안 선생은 중앙신학교 교장으로 계신 적이 있었는데, 그 학교의 부지가 세운상가 건설과 관계가 있던 시절이다. 버스 안에서 문득 말했다. “나는 물질에 대한 유혹이 생겨 이래서는 안 된다고 자제 할 필요가 없다. 그런 유혹 자체가 없어서다”라고! 얼마나 멋있어 보였는지 모른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그리고 그 삶의 자세는 평생을 통해서 유지되었다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하는 기쁨이 있다. 그가 저 앗시시의 가난한 성자 성 프렌치스코의 삶을 흠모하며 살았다는 것은 내가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안 선생은 사상적으로 과격하다는 평을 받았다. 사도신조에 대해서도 전통적인 입장을 버리는 편이다. 그는 의례적인 기도를 않는다. 아니 할 줄 모른다. 혼자 있는 동안은 알 수 없지만 설교자로서나 신학자로서 그는 자주 기도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기도했다면 심혼을 다한다. 그의 기도에 동참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바로 우리들 곁에 계신 것 같다. 간절하고 깊다. 하늘에 상달하는 기도가 저런 것이려니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 나만의 경험일 것인가!


4. 잊을 수 없는 한 모습


내가 잊을 수 없는 안 선생의 상 중의 하나만을 말하라면 무엇일까? 안 선생은 예수에게 미친 사람이었다. 역사의 예수를 알아보려고 독일 유학생활 10년을 보냈다. 당시 독일의 학계는 역사의 예수에 대해서 불가지론에 빠져 있었다. 그의 학문적 스승 불트만(R. Bultmann) 교수의 사상체계를 독파했고 그의 학문방법론을 속속히 꿰뚫어 보고서 그의 학문적 폭과 깊이에 대해서 이론을 말하기 어렵다는 것을 자인하면서도 끝까지 안 선생이 불트만에게 양보하지 않은것이 있었다. 역사적 예수를 알 수 없다는 스승의 학문적 결론에 동의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니 그것은 양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여기 새삼 쓰는 이유가 있다. 역시 안 선생은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를 진정 믿었고 사랑한 사람임을 극명하게 알게 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내가 한번은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 잔을 돌린 적이 있다. 안 선생 앞에 이르자 나는 흠찔했다. 그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어서다. 아이처럼 말이다. 그후 내가 “안 박사님, 성찬 받으실 때 눈물 흘리시던데요 … ” 하자 “아이 창피해, 그런데 나는 성만찬에 참여할 때면 거의 예외 없이 감격하게 돼 … ” 나는 그때의 안 선생의 눈물 그 모습을 보았기에 그의 과격한 신학사상을 접해도 아무렇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나는 향린교회에서 부담임자로 안 선생을 모시고 있는 동안 주로 지금의 향린교회당 신축에 전력을 한 셈이다. 나는 이하에서 말하게 되는 만남에서도 그러하지만 15개월 향린에서 함께 교회를 섬기는 동안 단 한번도 꾸중을 들은 기억이 없다. 화를 내신 것을 본적이 없다. 왜 그랬을까? 내가 일을 흡족하게 해서인가? 아니다. 그것은 분명 아니고 그의 관대함과 오래 기다림이라 여긴다. 나는 그가 내 스승이라는 생각이 분명하지만 겉으로 표현되지 않은 속마음에서는 그는 내게 형님 같았다.
향린교회 신축이 끝나고 헌당식이 있은 다음 나는 사표를 제출했다. 미국 유학이 이유였는데 내가 받은 J-1 visa는 1년후면 돌아와야 한다는 조건이 달린 것이었다. 이 때 안 선생은 사표를 내지 말고 일년 있다 오면 함께 계속 일하자고 하셨다. 나는 나를 여전히 필요하다는 그 한 말씀으로 족했다. 사표를 내고 떠났다. 공항에 전송 나온 선생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5. 안 선생은 교수직에서 두 차례나 쫓겨나다


안 선생과의 또 만남은 한국신학대학 내 모교에서였다. 1969년 학내 문제가 있어서 교수들이 사표를 내고 새롭게 교수 진영이 짜일 때 안 선생이 신약학 교수로 영입되셨다. 내가 2년간 해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나는 사실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1970년 귀국할 때 모교에서 시간강사로 일한다는 것 말고는 무계획이었다. 그런데 안 선생은 달랐다. 나를 만난 그는 두 가지를 말씀했다. 독일의 협력을 얻어 신학연구소를 만들 계획을 하고 있는데 그 일에 종사하는 것이 어떻겠는지 혹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은 어떻겠는지 하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한 바가 아니어서 바로 대답할 수 없어 잠시 머뭇거렸다. 그런데 안 선생이 먼저 말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좋겠오!” 한 마디 부탁의 말씀을 드리지 않았고 예상하지도 않은 말씀에 나는 처음 벙-했고 다음 감사했다.
그래서 1971년 이후 나는 안 선생과 동료(?) 교수로서 만난다. 안 선생은 교수로서 은퇴하던 1987년까지는 표면상 한국신학대학의 교무과장과 종합대학 후 대학원장의 보직을 담당하셨고, 대학 발전기획위원장을 역임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박정희 독재정권이 기승을 부리던 암울한 역사 현실 속에서 그의 신학은 ‘몸의 신학’ 그리고 ‘사건의 신학’이란 이름으로 표출되었고 한신의 대 정부와의 가열찬 투쟁과 하나님의 선교 차원에서 대학의 종합화 추진의 중심에 있었다. 1973년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이 오랫동안 그의 신학적 사고를 맴돌던 사건의 신학에 불을 당겼다. 그것은 민중신학으로 발전했다.
1975년에 한 차례 서울의 봄이라던 1980년에 두 번째 안 선생은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1976년 3월 1일 명동사건으로 옥살이 한 것은 교수직에서 물러난 다음 해였다. 유신이 선포되고 긴급조치가 1호에서 9호까지 발효되던 그 시절 200명 정도의 한국신학대학생은 반 독재 민주화 투쟁 전선에서 전국 100여개 대학 중 10순위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군의 위수령 발동 하에 정부의 학생제적 명령에 유수한 대학들이 굴복하고 마지막 하나 남은 한신이 표적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몇 차례 학생제적 독촉을 받은 학교는 거듭 교수회의를 소집하지만 결론은 제적 불가였다.
하루는 아침 식사 전 교수회의가 소집되었을 때 교수들은 내의를 입고 끌려 갈 각오를 하고 임했다. 안건은 제적건이었으나 회의 내용은 엉뚱했다. 안 선생은 교수들에게 정보기관에 가면 인격적인 모독을 당할 때 제일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그러한 경우에 인내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것은 안 선생이 일찍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정보기관에서 곤욕을 치른 적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안 선생의 지도에 따라서 학생 제적 건은 제쳐놓고 인격적인 모독을 당할 경우를 대비한 훈련(?)을 쌓았다. 결국 우리 대학도 학생 제적을 하고 말았기에 끌려가지는 않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안 선생은 남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1973년 늦은 가을 한신 교수들의 삭발사건의 발단은 안 선생의 제의에 따른 것이다. 학생들은 예배실에서 연일 농성을 계속하니 교수들은 아침마다 회의실에 모여 성서 읽고 기도했다. 하루는 아침 기도회가 끝나자 안 선생은 “우리 삭발하자”고 제안했고 누구 하나 이의제기하는 일이 없었다. 학장실에 걸린 대형 거울에 문동환 교수의 삭발 모습이 드러나자 안 선생은 “동환아!” 하고 불렀다. 아마 은진 중학교 시절의 문동환을 연상한 것이었을 것이나 그 부름은 절규였다. 훗날 안 선생은 우리의 삭발은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였지만 실로 삭발은 자책의 의미가 컸고 순수했다. 삭발사건이 저항이었다는 것은 해석일 것이다. 해석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다.
안 선생은 위에서 주마간산(走馬看山)식으로 언급한 한신의 저항의 중심에 있었기에 당국의 주목을 받았다. 결국 문동환 교수와 함께 안 선생은 일차로 교수직을 박탈당한다. 1975년 수유리 한신의 여름은 정말 뜨겁고 힘겨웠다. 학교는 10명 학생 제적에다 2명 무기정학을 단행하고 이사회는 두 교수(문동환, 안병무)를 파면한다. 당국의 강압조치에 순응한 것이었지만 불의에 밀린 것이다.
두 선배 교수들이 쫓겨난 후 남은 교수들의 입장은 난처했다. 남아 있는 것이 송구스러웠다. 이런 때 안 선생은 학생회에 편지를 띄웠다. 그 편지에서 학생들을 위로하고 특히 남아 있는 교수들을 이해하고 존경할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이 얼마나 큰 마음이었던가! 안 선생은 그런 분이었고, 그래 우리 소장 교수들은 그를 따랐다고 말하게 된다.
안 선생은, 1979년 박정권이 흉탄에 쓰러지고 나서 온 서울의 봄이라는 1980년 1학기에 교수직에 복권했다. 5년만의 교수 복직이었으니 당사자는 물론 한신인 모두에게는 한없는 기쁨이었다. 그런데 소위 1980년 봄은 데모의 물결로 투쟁의 봄이었다. 대학가의 공격 초점은 전두환과 신현확이었다. 마침 학교는 학장(조향독)이 사표 제출한 상황이라 교무보직을 가진 내가 교수회의를 소집할 수 있는 처지인데 안 선 생의 제안이 있었다. 교수 성명서를 내자는 것이었다. 나는 교수회의를 열었고 교수들은 그 당시로서는 가장 직설적이고 과감한 내용의 교수성명서를 결의하여 발표하게 되었다. 이런 성명서 작성 제안 만이 아니라 여러 경우에 안 선생은 신학자로서 신앙인으로서 불의 앞에 물러설 줄 모르는 삶으로 일관했다고 하겠다.


6. 사실 죄송했습니다


결국 신군부가 정권을 잡자 다시 반체제 인사 탄압이 시작되었다. 한신의 두 교수는 두 번째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 당시 안 선생은 파면을 당하는 것이 정도라는 생각을 하였지만 한신의 이사회가 본의 아니게 두 교수를 파면결의를 해야 하는 처지를 감안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역시 결벽증이 있는 분이기도 했다. 당신 스스로 사표서에 날인을 하지를 못한 것이 그 한 예다. 나는 안 선생의 사표서를 대신 쓰고 도장을 마련해서 날인하여 제출하면서 얼마나 죄송했는지 모른다. 내가 죄송하다는 것은 의례적인 말은 아니다. 문교부는 한신에서 문동환, 안병무 그리고 필자를 교수직에서 제명하라고 이사회에 지시했는데 후에 졸(卒)에 해당한 나는 조건부로 교수직을 지탱하게 된 처지에서 스승의 사표를 대신 제출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죄송한 일이었겠는가!
두 번째 쫓겨나고 다시 교수로 복직한 예가 세계 대학가에 있었는지 과문한 탓으로 나는 모른다. 그런데 안 박사와 문동환 박사는 다시 복직해서 정년 은퇴하셨고, 안 선생은 소천하셨다. 지금 계시지 않은 그분에게 죄송한 것이 또 있다면 박사학위 논문지도와 관련해서다. 그는 전혀 상관없는 말을 듣게 했다는 점이다. 나는 안 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학위논문 3장까지 쓰고서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았다. 학위를 꼭 취득해야한다는 당위가 내게는 없었다. 사실 학위 공부 시작도 자의로 한 것이 아니었으니 그럴밖에! 3년 세월이 휙 지났다. 그런데 안 선생은 한번도 직접 왜 논문을 쓰지 않느냐고 재촉하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와 다른 선배 교수의 재촉은 받았지만 안 선생은 모른 척 하셨다.
미국에 있는 후배(박계자 목사)의 귀국을 계기로 나는 전혀 새로운 소리를 들었다. 그 후배는 미국에 오신 안 선생에게 ‘왜 까다롭게 하셔서 황 교수가 논문을 쓰지 않게 하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그 것은 실로 사실이 아니었다. 안 선생은 까다롭거나 내 논문 진행에 다른 견해를 갖지 않았다. 나는 그 후배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안 선생을 밤에 갑자기 찾았다. 그는 서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거두절미하고 논문을 계속 쓰겠다고 말씀드리자 대뜸 “그게 내 소원이야” 하셨다. 나는 그의 소원대로 학위를 취득하고 그가 씌워주는 학위후드를 몸에 걸쳤다. 학위식이 있기 전야에 전화를 주셨다. 식에 참석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내 성격을 아시는 터라 확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불참이 정답이지만 내가 공인이라는 생각에서 참석하기로 했다고 하자 “그럼 나도 참석한다”고 하셨다. 나는 그렇게 그의 진한 사랑을 받은 셈이다.


7. 은퇴하시고서


대학 강단에서 은퇴하신 후에도 가르치는 일을 즐겨 계속하였고, 창의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성서를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하곤 하였다. 다만 건강이 늘 문제였다. 한번은 안 선생의 처조카(김정임)의 전화를 받았다. 울먹이면서 하는 말인즉 안 선생이 너무 아프시다는 것, 그러면서도 강의를 계속하려고 하신다는 것, 그리고 저 건강으로는 학기말 성적처리를 어떻게 할지 등 걱정이 많다는 것이었다. 내가 리포트를 보고 성적처리를 대신 해 드릴 수 있다고 대답한 것 외에 위로 할 길은 따로 없었다. 사실 안 선생의 건강은 그의 회갑기념 논문집 『歷史와 現存』을 제작할 때 이 논문집을 증정 받으실 수 있을까 하고 염려할 정도였으니 75세까지 그것도 쉬지 않고 강연하고 글쓰고 민중신학회를 이끌고 한국신학연구소와 목포의 디아코니아를 키워 온 것을 보면 많은 일 하면서 오래 사셨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 건강으로 신약성서를 사역하기 시작해서 골로새서를 마칠 무렵 소천하셨으니 철저하게 주어진 시간을 가득 가득 채워서 사시다 그는 홀연 갔다.
그의 좌우명(?)은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였다. 노자의 이 가르침을 따라 살려고 진력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알 것이다. 회갑논문집을 제작하고 우리는 출판기념회를 가지려 했으나 그는 한사코 사양하여 한 음식점에서 편집위원들이 그를 모시고 조촐한 증정식(?)을 한 바 있다. 안 선생의 생각이 달라져서인지는 모르나 안 선생의 고희논문집을 만들고 출판기념식을 가졌는데 안 선생은 전처럼 사양하지는 않았다. 연세 탓인지 아니면 당신의 소신을 꺾고서라도 그 책의 출판을 세상에 알려서 정의 사회구현에 일조를 기하려고 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의 크고 깊은 가르침 그리고 인간적인 냄새가 그립다. 그가 드리는 기도가 듣고 싶다. 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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