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무 교수를 기억하면서 20년의 경험과 관찰

by 운영자 posted Jul 0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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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하트무트 알부르샤트

(Hatmut Albruschat | 베르린 라자루스 디아콘 소장)


1. 그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한국의 선교라는 주제로 열린 독일 동아시아선교부의 연구모임에서였다. 그것은 1968년이었다. 한국 발표자의 한 사람이 하이델베르크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던 안 선생이었다. 그는 유창한 독일어로 민중의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우리는 열중해서 들었다. 이 사람에 관해서 우리가 더 듣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 사이에 나는 베를린의 독일 동아시아 선교부 책임을 맞게 되었다. 우리가 한국에 선교의 영역에서 서로 파트너로서 공동작업에 참여하기를 원하는지 한국으로부터 공식적 물음이 왔을 때 나는 그 대화에 참여했다. 우리의 대표인 한(F. Hahn) 교수와 한국의 대표인 안 박사 사이의 심의에서 처음에는 선교사의 파송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에큐메니칼 신학과 특히 독일 종교개혁 신학 그리고 고백교회의 작품들이 한국 교회와 거기에 소속한 목사들에게 친숙해지게 하는 과제를 갖게 될 신학연구소에 대한 지원과 협력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들은 지금까지 지배적인 북아메리카 교회의 근본주의 신학을 독일의 종교개혁적 사상으로 확대시키려고 했다. 북아메리카 교회는 그들의 많은 선교사들에게 상당한 선교적 발전을 이룩하는 책임을 맡겨 왔었다.
이 생각은 우리 마음에 들었고, 안 박사가 세워 놓은 계획의 토대 위에서 점점 실천으로 옮겨지고 1973년 슈트트가르트와 베를린에 세워진 선교부에 의해서 계속 수행되고 세워졌다. 그와 함께 한국과 독일의 그리스도인 사이에 파트너로서의 지속적인 협력이 이루어졌다.


2. 상황에 대한 경험


내가 1974년부터 베를린 선교부의 동아시아 책임을 맡아야 했기 때문에 주정부 교회는 나에게 동아시아에 3개월 연수체류를 제공했다. 1973년 10월부터 일본, 한국, 대만에 머물렀다. 나에게 주어진 과제는 동아시아의 산업선교(UIM)를 연구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6주간 머무른 다음에, 친구들은 내가 한국과 대만을 잘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거기서의 산업선교의 일은 고도 산업국가인 일본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토대를 갖기 때문이다.
그래서 1973년 11월 나는 한국에 왔다. 거기에서는 1971년 이후 박정희 장군 아래서 군사독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비참한 한국 전쟁 이후 얻은 국민의 민주적인 권리가 점점 폐기되었다.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은 바른 말을 하는 사람, 올바른 민주주의자, 기독교도, 불교도도 마찬가지로 체포되거나, 협박을 받거나 또는 중요한 자리에서 쫓겨났다. 교회와 교육기관에 대해서도 역시 정권은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안 박사는 그때 이미 서울의 우리 파트너 교회 소속인 한국신학대학의 신약학 정교수였다. 며칠 전에 정부는 학교의 소요학생들을 추방하도록 조치했다. 이 요구를 채우지 않는 교수들은 자신의 자리를 잃을 각오를 해야 했다. 이 같은 임의적인 조치에 대한 공개적인 절망과 학생들과의 연대감 때문에 교수들이 모두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이것은 그들에게 남겨진 마지막 자유였고 그들의 근거였다. 학생들이 4일간 단식을 했을 때 교수들이 새로이 학생들과 깊은 일치를 나타냈다. 단식 마지막에 그들은 성만찬 예배에 상징적으로 학생들의 손을 예수의 발씻음을 기억하면서 씻었다.
이 예배에 손규태 목사가 공항으로부터 직접 나를 안내했다. 나는 안 박사를 그의 삭발한 얼굴 때문에 곧 알아보지 못했다.
단식 후 학생식당에서 교수들과 함께 한 첫 공동식사가 매우 인상적이어서 이날의 여행은 여기에서 그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 나는 한국 음식이 처음이어서 전혀 맛이 없었다. 물론 오늘날은 한국 음식을 아주 좋아하지만 말이다. 안 박사는, 약간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어느 절의 비밀 모임에 나를 데려갔다. 여기에서 지식인, 그리스도인 그리고 비그리스도인들이 작은 모임을 이루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그 때에 자신의 분명한 행동과 정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때문에 “한국의 간디”로 알려진 함석헌도 있었다. 여기에서 정부의 지속적인 출판 검열에 대항하여 학생들, 교수들, 학자들에게 소식을 어떻게 전할 것인지가 논의되었다. 안 선생에 의해서 이미 세워진 한국신학연구소는 이미 여기에 참여하고 있었다. 여기의 첫 간사가 이미 아주 좁은 공간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나의 안내자였던 손 목사이다. 안 박사가 발행한 잡지 『현존』 안에는―그것은 오늘날까지 존속하는데(『현존』은 현재 『살림』으로 복간되어 나오고 있음: 편집자 주)―그것이 비판적인 정부 시기에 여러번 폐간되고 혹은 제한적으로만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이 은밀하게 받아들여졌고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며칠 후 내가 한국을 떠나 대만에 왔을 때, “민중신학”의 신학적 출발점이 완전히 옳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신앙을 세상에 대한 태도와 동참 혹은 함께 아파함으로 나타내야 한다는 것이고, 거기에는 물론 인권과 인간 존엄성, 민주적인 상태 그리고 모든 주민의 동등한 대우에 대한 의식적인 참여가 속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부와 분쟁을 야기했다. 안 박사와 많은 지식인들이, 그 가운데 잘 알려진 야당 정치 지도자 김대중 씨도 있었는데, 체포 직전에 있었다.


3. 단체들의 방문


한국 교회와 그들의 대표와의 오랜 동반자 관계 속에서 독일 측으로부터 방문이 상당히 강화되었다. 군사독재의 고난의 시대에 한국의 목사와 다른 교회 대표들이 여행 비자의 어려움 때문에, 우리들이 여러 여행 계획을 세웠다. 안 박사가 우리들을 국가와 투쟁 속에 있는 한국 교회의 어려운 상황으로 안내했을 때, 이런 상황 앞에서, 그리고 안 박사를 만나고 나서, 많은 여행객들은 더욱 감동적인 인상을 받았다. 연속적으로 교회를 방문하면서 이미 계속된 인사말 속에서 이 같은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항상 자신의 집이나, 서울 그리고 천안에 손님을 초대할 때, 혹은 우리가 그의 연구소에서 만났을 때, 몇 마디 말로 자신과 서남동, 또는 다른 한국 신학자에 의해서 발전된 민중신학의 토대를 설명하기 위해서 안 박사는 방문객을 기꺼이 환영했다. 『성문 밖에서』(Draussen vor dem Tor)―이것은 독일어로 출판된 그의 책 이름이기도 하다―라는 예수의 사신이 처음 생기고, 또한 유대 백성의 가장 가난한 부류에게서 그 출발점이 놓였는데, 그는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게 설명하였고, 묻고 대답하는 가운데 논의가 깊어졌다. 신학자뿐만 아니라 디아콘도, 함께 여행한 교회 동료들 혹은 베를린 교회의 공식 대표들도 이 점을 이해하였다.


4. 이념과 한계


안 박사는 주목할 만한 미래의 전망으로 그의 이념을 발표하고 파트너의 협조를 얻었다. 그는 목적 지향적으로 한국신학연구소의 작업을 확장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한국의 파트너 관계에서 초보적인 단계를 중단하고 에큐메니칼적인 토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 두 가지가 다 이루어졌다. 20여 년간의 연구소의 출판물 가운데 『국제성서주석』 시리즈를 비롯하여 미국과 독일의 표준적인 관련 서적들의 번역본들이 있다. 거기에 대해서 안 박사는 독일 교회와 그들의 후원조직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영성과 구호 활동은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에 대한 그의 신학적 출발점으로부터 당연하게 나왔다. 독일로부터 그는 디아콘의 일을, 특히 여디아콘의 삶과 활동을 알았다. 70년대까지 한국에는 개신교에서 어떤 자매단도 없었다. 영성과 공동체라는 그의 강연에 대한 재심문을 통해서, 그리고 운도 따르고 해서, 그에게 목포에 있는 땅이 주어졌다. 거기에 안 박사는, 이미 그의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안내를 통해서 공동체로서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의 길을 닦고 있던 여인들을 모았다. 독일에서 간호원으로 일했던 여인들, 교회에서 어떤 완전한 자리를 얻지 못한 여신학자들, 또는 돕기를 원하는 교회 신도들이 있었다. 안 박사와 그의 연구소에서 일년 이상 일했던 독일 신학자 도르테아 슈바이쳐는 작은 심장병원을 또는 작은 예배처소와 수녀원 본원을 건축할 때 독일로부터 지원을 받아 이 공동체를 세웠다. 그곳에서 나는 자매들과 안 박사와 서로 쌓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곳에서의 많은 만남에서, 나는 그의 목회적인 대화와, 영적 삶의 깊이에 대한 명확한 규정, 그리고 실천적인 일 등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연구소와 관련해서도 주목할 것이 있다. 그는 가능한 한 빨리 해외 교회의 의존이나 원조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박정희 장군의 독재정권 시절의 감옥 생활 때문에 그의 건강은 아주 악화되었다. 심장 문제 때문에 1985년 이후 그는 마음놓고 일을 할 수 없었고 여행도 제한을 받았다. 그가 한국-독일 교회 협의회에 참석했을 때 혹은 우리 수녀원의 손님으로 있을 때, 독일에서 우리는 그것을 깨달았다. 강연과 긴 여행 후에는 오랜 휴식이 필연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박사는 그의 마지막 프로젝트를 실현했다. 서울의 남쪽인 천안에 아우내 재단이 건립되었다. 높은 산 중간에 놓인 삼림지대에 그는 한국신학연구소를 옮기고, 모임을 갖고 숙박을 할 수 있는 만남의 중심지로서 영성과 평화의 집을 세우고 목포 디아코니아의 세 명 자매의 공동생활을 위한 자리를 만들었다. 그는 그것이 완공되고 그 일이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5. 무엇이 남는가?


이제 이런 일화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마쳐야 하겠다. 안 박사가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내린 많은 결정들을 비판적으로 관찰해서는 안 된다. 그의 삶의 많은 궤적들에서 그는 매우 외로웠다. 개인적인 대화 속에서, 그가 얼마나 모든 활동을 예수의 말씀 아래에서 이해하는지 언제나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없다”(요 14:6).


안 박사의 모습은 나의 삶과 마음 속에서 계속 살아서 활동하고 있다.